특별한 날
여름이었다.
초여름이란 말이 무색하게 한여름처럼 더웠던 날씨에, 격식을 갖춘다며 남색 정장을 꺼내입었다. 다사다난했던 2주간의 연수끝에 팀을 배정받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국제회의장에 모인 나와 내 동기들은 설레고 긴장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다리를 떨어가며 이름이 호명되길 기다렸다. 내 이름은 본사 발령 명단중 가장 마지막으로 불렸다. "000씨, 도입기획팀"
인사팀 선배의 안내로 허둥지둥 4층에 내려 왼쪽편 입구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내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업무를 다들 멈추시고 우리팀은 나를 한가운데로 앉혀 맞아주셨다. 맛있는 점심을 함께하며 팀원 얼굴을 익히고, 곧이어 첫 저녁 회식에 참석하며 그들에게 나를 알렸다.
그날밤, 소맥을 서너잔 이상 마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엄마에게 전화해서 회사생활 첫 날이 어땟노라 한참을 이야기하다 지쳐 잠들었다. 나도 이제 어엿한 조직원이라는 뿌듯함, 환대해준 팀원들에 대한 고마움, 업무에 대한 기대감 등. 그날의 꽉찬 행복감이 미몽처럼 남아, 오늘날까지 내 회사생활을 버텨낸 동력이 되어줬을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팀
내 첫 팀은 해외 셀러들로부터 에너지를 구매하는 전략을 짜고, 계약 체결시 가격 등 계약 조건을 협상하는 역무를 가진 팀이었다. 회사내에서도 일을 잘한다고 정평이 나있는 사람들이 모인 팀인지라, 바로 윗 사수부터 (저- 높은 곳에 있어 자주 뵙지 못한) 최종 결재자까지 어느 한분 대단치 않은 분이 없었다.
다만, 동시에 그것이 나를 항상 주눅들고 부담되게 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그들의 아성이 너무 높아 나같은 대학 갓 졸업한 조무래기가 어떤 면에서도 도움이 안될 것 같아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러던 어느날 여기저기서 공부하라고 던져주신 자료들을 다 탐독해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팀장님이 오후에 있을 협상 킥오프 미팅에 막내(=나)도 들어가라는 지시를 하셨다. 심장이 뛰었다.
특별한(?) 신입사원
그날 그 미팅이 끝나고 오후내내 달떠 있던 나는 술한잔 걸치지 않은 채로 팀 전체카톡방에 노란 풍선이 터져라 길게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직도 화끈거리지만, 나는 순수하게 회의때 내가 느낀 흥분되고 벅차오르는(?) 마음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팀원들에게 당신들이 맞이한 신입사원이 순수한 열정에 휩싸인 도라희라는 것을 뜻밖에 알린 대목이기도 했다.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협상이라는 것이 서로 원하는 것을 주장하다 주고 받는 게임인 줄 알았는데, 철저한 논리 싸움인줄은 몰랐고, 상대방의 논리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한편 우리가 주장하는 바를 영어로 멋지게 프레젠테이션하는 우리 팀 모든분들이 너무 멋지고 대단해보였다. 지금은 병아리지만 얼른 커서 팀에 도움이 되고 싶다"
그 후로 내 열정에 보답(?)을 해주고 싶었던 선배들 덕인지, 일이 썰물처럼 몰려들었다. 진짜 날 것 그대로의 "열정"만 가득했던 신입 사원은, 그 역량 불충분에도 수많은 일들에 휩싸여 참으로 정신없이 배우고, 치열하게 일했다.
특별한 사수
그 해, 내 치열한 배움은 주로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는 나와 거의 입사년도가 20년 가까이 차이나는 (당시) 라인 차장님이었다. 육아휴직으로 한달 남짓 함께했던 테토녀 대리님이 사라지자 그와 내가 덩그러니 라인에 남았다. 그도 나를 사람 만들어 써볼까하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진 않았겠지만, 밥도 잘먹고 술도 잘먹고 넉살좋은 내가 혹시 일도 잘하려나 싶어 이것 저것 시켜보셨다. 복사, 스캔, 황화일 정리, 제본, 문서에 날개 붙이기 등 정말 기초 중의 기초가 되는 일이었는데, 여기저기서 인턴으로 구르며 눈칫밥 먹은 세월 덕에 나는 (의도치 않게) 그의 퀘스트를 하나하나 깨어가고 있었다.
어느 회의에 참석해도 그림자처럼 역무가 없었던 시절의 어느날, 회의 끝에 그가 내게 말했다.
"00씨, 오늘 회의 내용 보고서로 정리해서 함 보자. 오후 5시 쯤에."(항상 5시에 보자고 하셨다;;)
"넵! 차장님 알겠습니다!" (네? 제가요? 왜요? 언제부터..? 아, 그럼 미리 말해줬어야지 이 양반아... )
혹시라도 내면의 소리가 필터없이 나올까 싶어 황급히 화장실로 이동해서 숨을 크게쉬고 첫 보고서를 써내려갔다.
몇 시간 뒤, 한번에 통과되는거 아닌가라는 대단한 착각을 하며 그와 마주 앉았다. 그는 총평처럼 보고서는 작성자가 아니라 그 그을 읽는 사람 중심으로 생각해서 써야한다고 영원한 지침이 되는 말을 해주었으나 지금은 알고, 그땐 몰랐다. 그 말의 의미를.
곧이어 빨간펜이 그의 손에 들렸고 그렇게 1차 수정. 그리고 2차 수정, 그리고 3차, 그리고 ... 17차 수정을 끝으로 나의 첫번째 보고서가 완성되었다. 그게 뭐라고 겨우 3페이지 짜리 보고서를 완성했는데 그 뿌듯함에 치를 떨다 진이 빠졌다. 밤 11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그가 회사에서 보고서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선배라는 것을 알게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그의 코칭은 너무도 날카롭고 예리해서 때로 내 자존심을 뭉개고, 때론 서럽게 만들게도 했으나, 그가 코칭한 내용 중에 거를 것은 하나 없었다. 그가 수정하면, 반드시 나아졌다. 그러나 당시엔 그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야속함이 짙었다.
직장생활을 오래 했으니 그 정도 코칭은 당연한 것이고, 보고서 수정이 재차 이뤄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완벽주의 성향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 직급이 오를수록, 후배들로부터 내 검토와 결재를 요하는 문서가 많아질수록 나는 그를, 그리고 그의 말을 매번 더 선명히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수였는지도.
차라리 새로 쓰는 것이 쉽지, 이미 누군가의 생각의 틀안에서 한번 모양새를 갖춘 보고서를 고치는 것은 훨씬 어렵고 많은 에너지를 요한다. 당신이 썻다면 1시간에 끝났을 일을 그 많은 수정을 거치게 하며 나를 가르쳤다는건 나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나는 오로지 문서로 말하고 설득하고 실행하는 이 회사에서 지금까지 먹고 살며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그에게서 찾는다.
그는 시시콜콜한 농담을 나눌때나, 술자리에선 영락없는 철부지 중년 아저씨였으나, 일을 대할땐 눈빛부터 바뀌었다. 그는 늘 일을 늘 일로써 대했다.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그림을 그리고 추진해나가는 동력은 정말이지 무서웠다. 그는 내게 늘 말했다. 상대방도, 나도 결국 지금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고. 일 대 일로 만나면 제일 무서운 사람은 그 일을 끝까지 밀어부치겠다는 집념과 그에 대한 논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그는 모르겠지만, 내 직장인 자아의 8할은 그가 키웠다.
특별한 바둑돌
내가 정말 직장인이 되었다고 느낀 순간은 첫 보고서를 쓴 때도 아니고, 첫 해외 출장을 간 때도 아니고, 첫 월급을 받았을 때도 아니다. 그 순간은 어느날 불현듯 찾아왔는데, 그것은 내가 내이름 석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몇년 차, 어느 소속, 사번, 누구의 형태로 조직속 일원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았을 때다. 매년 연말이면 조직개편이나, 승진, 전보와 같은 변화의 과정을 목도하는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내 자신을 바둑판에 놓인 바둑돌 그 이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첫 해엔 놀랐고, 두번째 해엔 씁쓸했고, 때때로 화가 나거나 슬픈적도 있었지만, 몇십번 월급을 받다보니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은 기왕이면 더 맨들맨들하고 반짝이는 바둑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놓은 적은 없던것 같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싶다는 열망은 조직에 들어와서도 쉬이 놓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그를 만났다. 그의 세계에서 나는 늘 존재 자체로 특별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