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만남
그를 만난건 술자리에서였다.
입사 후,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아 바로 윗기수 선배들과 얼굴을 트고 친해질 수 있는, 일명 '대면식'이라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60명이 넘는 사람들을 한데 모으다보니 회사 앞 오리집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길게 늘어선 테이블 열이 5열이었나, 6열이었나. 또래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제대로 흥이 오른 나는 새로 알아가는 한 사람당 한 잔을 비웠으니, 마지막 열에 다다랐을땐 정신만 겨우 붙잡은 만취상태였다.
그때, 정신을 차려보니 옆에 그가 앉아 있었다.
얼굴을 보며 인사를 나눴는데, 어딘가 낯이 익엇다. 같은 층, 같은 편 복도를 다니며 많이 본 그 사람이었다. 이미 많이 취한지라 더이상 무리해선 안될 것 같은 생각에 그가 술을 따를때 살짝 손가락을 술병쪽으로 대어 적게 마시려는 꼼수를 썼는데 그에게 딱 걸려버렸다. 내가 멋쩍어 하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이 웃고 있었다. 말한마디 없었지만, 나는 안다. 그건 분명 나를 귀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날 밤, 몽롱함에 모든 장면이 흐릿했지만 그가 나를 바라보던 그 표정, 그의 미소만 선명히 남았다.
호감의 시작이었다.
특별한 점심
열건이 넘는 밥약속을 잡았는데, 가장 먼저 밥먹자는 연락이 온건 약속을 잡지 않은 그로부터였다.
"언니, 우리팀 선배가 언니랑 나 같이 밥 사주고 싶다는데? 왜지? 다음주 수요일 점심 시간 돼?"
우리는 멀쩡한(?) 정신으로 점심에 다시 만났다. 나는 그날, 그가 오래된 검은색 아반떼를 끌고 다닌다는 것, 공대를 나왔다는 것, 말수가 적지만 유머 타율이 꽤 높다는 것, 이직을 두어번 한 탓에 나보다 나이는 한참 많다는 것 등 그에 대한 소소한 사실 몇가지를 알게 되었고, 나와 모든면에서 참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며 그가 더 궁금해졌다.
유난히 짧았던 점심이 아쉬워 다음 밥약속을 이어 잡았다. 그 약속 뒤엔 보답을 하겠다며 한번 더, 그 뒤엔 멤버를 바꿔서 한번 더, 그 뒤엔 또 다른 명목을 붙여가며 계속해서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얘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아갔다.
특별한 저녁
그러던 어느 저녁, 둘의 호감이 쌍방이라는 것을 눈치챈 다른 선배가 저녁 술자리를 주선했다. 그날 마신 사케가 달던탓인지, 가을 바람 탓인지, 아니면 그냥 그사람탓인지... 나는 기분 좋게 취했고, 술자리가 파한 뒤 집까지 걸어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선배들이 걱정스럽게 만류했지만, 이미 걷기 시작한 나는 꽤나 멀찍이 서서 내일뵙겠습니다! 라며 외치고 돌아섰다. 그림자같이 그가 따라왔다. 위험하니 걸어서 데려다 주겠다며. 그렇게 우리는 새벽 두시가 넘은 시각에 함께 걸었다.
번화가를 벗어나 탄천으로 접어드니 잠든 도시에 그와 나만 덩그러니 남은것 같았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정적이 찾아오면, 천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BGM 처럼 그것을 메워줬다. 온도도, 습도도, 바람도, 낭만도. 연출한 것 처럼 모든 것이 적당했던 밤이었다.
30분쯤 걷다보니 술이 깬 나는, 그제서야 내가 하이힐을 신고 지금까지 걸었다는 사실이 인지됬다. 발이 너무 아픈 나머지, 옆에 있는 그를 잊은채 (나답게) 구두를 벗어 양손에 들고 맨발로 걸었다. 발이 편안해지자 문득 FM스러운 그가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 싶어 그의 눈치를 슬쩍봤는데...
그도 구두를 벗어 함께 맨발로 걷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쌓아온 데이터로 취합된 그 사람은 새벽 두시에, 맨발로 걸어서 집까지 가는 그런 종류의 사람(=나)이 아니었다. 그 순간 놀랍고도 반가운 마음에 나는 폭소를 터트렸다. 그는 또 처음 본 그날처럼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우습지만, 그때 확신했던 것 같다.
나를 나로 규정짓게 하는 수많은 면모들에 대해 굳이 이해를 구하지 않아도 될거 같은, 이상하게 깊고도 단단한 안도감이라 해야할까. 그의 안에서 나는 늘 나로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은 안정감. 그때 그와 결혼하게 될 줄 알았다고 말하면 너무 결과론적인 이야기일까.
특별한 시작
그는 내게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고, 사귀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어느 저녁, 헤어지기 싫어 동네를 함께 산책하다 문득 나는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물으며, (그가 준비한 타이밍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귀자는 그의 말을 받아냈다(?).
그렇게 가을의 한 가운데서 우리는 시작했다.
그는 우리 관계가 규정지어지자마자 결혼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그에게 가진 확신보다 그가 내게 가진 확신이 더 깊었다는 것을 알고, 잠시 마음이 뒷걸음질 쳤으나,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나는 적어도 사계절을 만나보고 결정하고 싶다며 내 대답을 유예했는데, 로봇같은 그는 나의 말을 문자 그대로 입력해버렸다. 정확히 사계절을 함께 보내고 그 다음해 가을, 그는 내게 프로포즈 했다.
특별한 우주
그는 반듯하고 성실하다는 주위의 평을 평생 달고 살았다. 넉넉한 유년시절을 보내진 못했지만, 그덕에 그는 지금 그가 가진 많은 장점들을 얻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원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노력해서 일구며 또 이루며 살아온 덕에 언제나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자신감과 당당함이 돋보였는데,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좋아했고, 일견 존경하기까지 했다. 부모님의 따뜻하고 든든한 지원을 받고 큰 탓에 내겐 없는 그의 현실적이고, 생활력이 강한 단단한 면모는, 인생의 어떤 풍파가 닥쳐도 이 사람과 함께라면 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과 확신을 주었고, 내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유롭고 즉흥적이며 변화를 좋아하고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나와, 책임감 있고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신중하고 예측가능한 상황을 선호하는 그.
우리가 자라온 환경이나, 공부해 온 분야가 아무리 다른들 우리 성향의 간극만큼 클 수 있을까. 세상을 오로지 내 중심으로만 살아온 나는, 나와 교집합이 없는 이 사람을 알아가고, 배워가고, 사랑하면서 새로운 우주를 마주한 셈이다. 그리고 이토록 모든 것이 대척점에 있는 두 우주가 서로를 알아보고 평생을 약속한 것은 그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수 없는, 그저 운명이었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특별한 선택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고작 28년만에 끝내 버렸다. 어렸기 때문에 순수했던 탓일까, 아니면 모든 고민을 오래 붙잡거나 계산하지 않고 직관에 의존하는 나의 성격탓일까. 결혼이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과 그 의미에 대해 내가 지금 인지하고 있는만큼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선택은 달라졌을까.
이따금씩 그런 상상을 해본적이 있던 것도 같은데, 최근에 어떤 산문집을 읽다가 그때의 내가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결정했는지 문득 깨닫았다.
사실 당시엔 이런 질문 자체가 내겐 없었다. 상대가 가정을 꾸릴 경제적 능력을 갖추었는지 알아보지도 않았고, 결혼 후 겪을 가부장제와 양성 불평등을 미리 우려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런 문제들이 걱정되지만 우리의 사랑으로 다 이겨낼 수 있어’ 같은 정신 승리나 자기합리화도 필요하지 않았다. 결혼에 이르는 과정 중의 모든 번잡스러움은 한낱 절차라며 불과했고 관심도 없었다. 나는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라도 빨리 손가락 깍지 끼듯 뿌리 끝까지 얽히고 싶었다. 낭만주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예 ‘생각’ 자체가 없었던 한심함이기도 했다.
아무 생각조차 나지 않을 만큼 결혼이 나를 압도한 이유는, 그것이 내가 누구로부터 격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증명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번뜩한 순간의 착각이라 해도, 나중에 오판으로 결론 나더라도 말이다. 100미터 달리기인 인연을, 삶의 온 것을 걸고 뛰어넘게 하는 힘. 망할 줄 알면서도 뛰어드는 어떤 맹목적인 마음에, 나는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한 찰나를 본다.
<평범한 결혼 생활> 中, 임경선
누군가에겐 결혼이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남들할때 해야 마음이 편한 인생의 숙제이며, 또 누군가에겐 가족을 꾸려 안정을 얻는 과정이겠지만,
내게 결혼의 의미는 윗 글의 작가와 같이 그저 사랑의 증명,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리하여 어떠한 계산이나 고민의 수반없이, 용감하고도 담대하게 뛰어들 수 있었다.
어쩌면 그때의 그 무모하고도 찬란했던 찰나의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