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를 시골에서 나온 나는 학창 시절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냈다. 그러다 잠깐 친한 친구들과 중 3 때 영어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학원에선 수업 시작할 때마다 영어 단어 암기 시험을 쳤다. 50개를 외워야 했는데 친구들은 1시간 일찍 학원 자율학습실에 도착해 단어를 외웠다. 미리 외우기도 했고 이미 알고 있던 단어들도 있어서 나 역시 그 정도 시간을 두고 외우면 괜찮은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이 공부하는 그 시간에 만화책을 보던 친구가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 10분에 영어 단어 50개를 쭉 훑어보고는 바로 시험을 봤고 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나도 IQ로 따지면 또래들보다 훨씬 높았지만 그 친구의 단기 암기력은 소위 '어나더 레벨'이었다. 그때는 그 친구의 재능이 너무도 부러웠다.
물론 나에겐 지금 그 친구의 재능이 필요하지 않다. 지금 나에게 단기 암기력은 절실히 필요한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내가 그 친구의 암기력을 부러워했던 것처럼 지금 내 경력에 있어서 필요한 재능 한 가지를 골라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어떤 것을 선택할지 궁금해졌다.
어떤 재능을 택할지를 말하기 전에 많은 직장인들이 착각하기 쉬운 부분이 있다. 바로 자신이 특정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재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 경우를 예로 들면, 두 번째 회사인 외국계 회사에서 7년 정도 전략 매니저로 일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내가 전략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까?
첫 회사에서는 신입사원을 공채로 뽑았는데 동기들 중 삼분의 이 정도는 본인이 희망하는 부서로 발령받지 못했다. 경영학 전공했던 동기는 본인이 원했던 재무팀이 아닌 식품영업팀에, 의류학과를 나왔던 동기는 홍보팀 사보 담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후 두 명의 동기 모두 5년 이상 같은 업무를 했다. 둘은 영업과 사보 업무에 재능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대기업에서는 임원을 달지 못하고 팀장이나 부장으로 은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10년 넘게 팀장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리더십이라는 재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내 얘기로 돌아가서, 두 번째 회사로 이직할 때 면접 과정에서 어느 정도 경력과 실력을 검증받고 전략 매니저가 된 경우여서 어느 정도 직무에 적합한 능력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업무 능력을 검증받은 것일 뿐 내 재능까지 검증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재능은 일정 부분 타고난 부분이 없지 않다.
상대적으로 경력을 중요시하는 대기업과는 달리 스타트업은 인터뷰에서 재능을 찾고자 한다. 직전 회사의 경우, 기술 과제, 실무진 면접, 임원 면접, 글로벌 면접 등을 거쳐 모든 면접관들이 라운드 테이블을 통해 합격을 결정한다. 그렇게 한 사람의 지원자에게 5시간 가까이 투자하는데 이 시간 동안에 어떻게든 그 사람의 재능을 발견해야 한다.
지원자의 재능을 찾기 위한 왕도는 없다. 공통 질문 이외에 면접관들 각자가 자신의 스타일대로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내 경우는 그 사람이 직장에서 돌발 상황 발생 시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는 지를 집중해서 묻는 편이다. 돌발 상황 시 경험을 풀어내는 것은 경력도 도움이 되지만 재능이 더 발휘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본론으로 돌아가 앞으로 내 경력에 있어서 필요한 재능을 골라보자.
말 그대로 현실적인 선택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본인이 부지런히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재능을 갖추기 위해 힘쓴다. 1만 시간의 법칙처럼 특정 재능의 경우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경험을 축적하면 그 재능을 갖추기도 한다. 단순 반복의 단계를 넘어서서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오른다.
내 경우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사실 별로 없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 '마크는 이 부분에 정말 재능 있어요'라는 말을 듣는 것이 있다면 다름 아닌 운영 능력이다. 커뮤니티 모임이 됐든 회사 프로젝트가 됐든 여러 사람이 모인 집단을 잘 이끈다. 정확히는 사람들을 잘 이끈다고 할 수 있다. 구성원 각자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해서 각자에게 맞는 역할을 주거나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전체에 기여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재능의 경우 타고난 것이 아니었다. 사실 난 학창 시절까지만 해도 말을 많이 더듬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에는 젬병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재능이 되었을까? 말은 더듬었어도 난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들과 만나고 관계를 맺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 보니 그런 자리를 누구보다 내가 먼저 만들게 됐다. 학교든 교회든 회사든 커뮤니티든 어디든 말이다. 그렇게 사람을 모았고, 그곳에서 사람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의견을 모아서 행동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 시간과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20년 정도가 쌓이다 보니 재능이 됐다. 그리고 그 재능을 통해 계속해서 모임을 만들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재능을 원한다면 가장 필요한 것은 적극성이다.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시작할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경우에는 정말 시작이 반, 아니 시작이 전부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대학 시절 동기 한 명이 떠오른다. 당시 같은 동아리여서 주말마다 같이 축구를 했다. 그 친구는 운동에 소질이 없었다. 공을 제대로 멀리 찰 줄도 몰랐다. 그런데도 매주 운동장에 나와서 수비를 했다. 공을 제대로 찰 줄 모르니 할 수 있는 게 수비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학 시절 4년 동안 수비만 봤더니 어떤 결과가 생겼을까? 공격수를 질식시킬 만큼 집요한 물귀신 수비를 하는 재능이 생겼다. 적어도 자신이 맡은 공격수가 제대로 공격을 하지 못하게 했다. 축구 같은 운동에는 타고난 운동 신경이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했던 내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고를 수만 있다면 가질 수 없는 재능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내게 가질 수 없는 재능이 있다면 '대표로서의 자질'이다. 스타트업에서 임원을 하면서 매일 같이 느낀 건 '나는 절대로 대표하기 싫다'였다. 정확히는 '나는 대표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였다. 직원들의 월급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또 챙겨야 하는 자리,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동안 회사 일만 생각해야 하는 자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난 그런 깜냥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가질 수 없는 자질도 고를 수만 있다면 선택하고 싶다. 왜냐하면 내가 앞으로 생각하고 있는 커리어 패스는 대기업 직원이 아니라 작은 사업을 운영하는 리더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꼭 대표가 아니어도 작지만 튼튼한 회사를 효율적으로 운영해서 성장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로서의 안목과 자질이 있다면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에 부합할 것이다.
어찌 보면 재능은 자신이 원하는 포지션보다 한 단계 더 위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HR팀장이 되는 것이 목표라면 그 위 임원인 인사실장으로서 필요한 재능을 일부 갖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자신이 속한 숲을 큰 그림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도 있지만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도 많다. '자리'라는 방향을 가지고 올라갔는데 그 '자리' 때문에 없었던 재능이 발현되는 경우가 있다. 아니 정확히는 봉인된 재능이 해제되어 발휘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가질 수 없다면, 때로는 '자리'를 목표로 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 자리에 맡는 재능이 내게 있을지 없을지는 100% 자신할 수 없어도 그 재능을 갖고 싶은 열정이 있다면 적어도 회사에 폐를 끼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내 주변엔 고맙게도 현재 자신의 보스에 만족하는 직장인이 제법 있다. 하지만 복수의 통계 자료를 보면 직장인 절반 이상이 팀장에 불만족한다고 한다. 물론 개별적으로 불만족한 부분이 서로 다를 것이다. 자, 그렇다면 나의 리더에게 부족한 2% 부족한 그 재능을 자신이 갖는다면 어떨까?
"우리 팀장은 말이야. 사람 말을 제대로 끝까지 듣질 않아. 무슨 말을 해도 결국 자신이 정한 대로 밀고 나가니 팀원들이 이제는 아무 의견도 내질 않는다고."
이처럼 커뮤니케이션에 재능이 없는 팀장을 만났다면, 본인이 그 재능을 선택해보면 어떨까? 고를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면 당장 팀장과의 문제도 조금씩 풀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팀원끼리 미팅에서는 좋은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 내 경우 팀장님이 예전 방식의 리더십을 고수하셔서 고생했던 적이 있었다. 본인이 결정하면 팀원들이 다 따를 거라 생각하고 톱다운으로 늘 의사소통을 하신 것이다.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을 때는 그냥 포기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포기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팀장님 바로 아래 부장님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드리고, 부장님이 팀장님과 팀원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특정 사안에 대해 팀원들이 의견을 모으면 그 내용을 가지고 부장님이 팀장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서 자연스럽게 팀원들의 의견을 전하고 조율하도록 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팀장님이 완전 꽉 막힌 분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렇게 정제된 의사 전달을 해준 것을 좋아했다.
직장 생활에서 우리는 팀장 뒷담화를 가장 많이 한다. 반면 그렇게 뒷담화한 팀장의 부족한 재능을 우리가 가지려고 노력하지는 않는 편이다. 가질 수만 있다면 그 재능을 선택했을까?
단점을 상쇄할 수 있는 재능을 고르는 것도 꽤나 현실적인 선택이다. 내 단점은 덤벙거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나에게 '침착함'이라는 재능을 선택할 수 있다면 현실적이면서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덤벙거림은 여전히 단점이지만 한편으론 더 이상 단점이 아니기도 하다. 왜냐하면 침착함이 장점이자 재능인 내 아내가 그 부분을 상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점을 상쇄할 수 있는 재능을 택할 수도 있지만, 상쇄할 수 있는 사람을 주변에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 부모님과 봐도 그렇다. 아버지는 여행을 좋아하고 일중심이면서 평판을 중요시한다. 어머니는 집을 좋아하고 사람중심이면서 사람 눈치를 안 보신다. 너무 안 맞는 부분이 많아서 젊으셨을 때는 티격태격하셨지만 지금은 서로의 단점을 서로가 보완하면서 아름다운 노년을 준비하고 계신다.
자신의 단점을 없애는 것은 때론 위험하다. 그 단점이 과연 단점이냐는 질문부터 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단점을 없애는 것보다는 장점은 살리는 것이 조금 더 현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점은 주위 사람들로 만회하는 시도를 먼저 해보자.
재능을 자판기에서 뽑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재능을 갖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꼭 필요한 재능 하나를 골라보자. 재능을 선택하는 순간 몸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참으로 신기해서 우리가 마음으로 무언가를 결심하면 그것에 맞게 움직이려고 한다.
내 경우 앞에서 언급한 대로 'CEO로서의 자질'이라는 재능이 없다. 그런데 갖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내가 네트워크를 맺는 사람들 중 스타트업의 대표분들이 많았다. 당장 내가 그 재능을 가질 순 없지만 이미 그 재능을 갖고 있는 분들과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던 것이었다. 내가 마음으로 재능을 선택하는 순간 내 몸이 그 방향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재능이든 가질 수 없는 재능이든, 또는 내 리더가 부족한 재능이든 내 단점을 상쇄할 수 있는 재능이든, 내가 지금 필요한 재능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고를 것인가? 고민하고 선택해보자. 그리고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자.
내가 현재 갖길 원하는 재능은 '집중력'이다. 팬데믹 기간인 데다 캐나다로 건너와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전이어서 시간은 남들보다 훨씬 많은데 집중력이 부족해 뭔가 이룬 것이 없어 불안하기 때문이다. 집중력만 있으면 계속 발전하고 있는 기술 분야든, 영어가 됐든, 사업 구상이 됐든 발전이 있을 것 같다.
자, 당신은 하나의 재능을 고를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제 퍼블리 두 번째 글 <이직 면접에서 반드시 증명해야 할 8가지>가 최근 발행됐습니다. 감사하게도 첫 번째 글 <일에 끌려 다니기는 그만! 상황으로 배우는 주도적 일하기 3가지 방법>이 많은 사랑을 받아 6월 발행 콘텐츠 중에 만족 수 1위를 차지했습니다. 퍼블리와 브런치 글들이 서로 시너지를 냈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