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캐나다 북스토어인 인디고를 찾았다. 둘 다 책을 자주 읽진 않아도 인디고의 분위기를 좋아해 자주 둘러본다. 마침 비즈니스 코너 앞 의자에 앉았는데 아내가 대뜸 물었다.
아내: 자기는 가장 잘하는 게 뭐지?
나: 글쎄, 뭘까?
아내: 자기는 사람 돕는 거 좋아하고 잘하지 않아?
나: 어, 그래서 지금 테니스 코치도 하고 있고 컨설팅처럼 누군가를 돕는 일도 많이 했지.
아내: 그럼 자기가 3년 반 동안 캐나다에 살면서 여기 사회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일이 뭐인 거 같아?
나: (웃으며) 지금 컨설턴트를 컨설팅하려는 거야?
아내가 이 질문을 던진 것은 처음이 아니다. 커리어에서 다음 단계를 고민하는 내게 종종 묻곤 했는데, 추운 겨울이 다가오자 부쩍 묻는 빈도가 늘었다.
내가 가장 잘하는 '사람을 돕는 일'을 어떻게 하면 발전시켜서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을까? 아내와의 대화는 더 진척이 되진 않았지만 집에 돌아와 좀 더 생각해 봤다.
사람을 돕는 일의 정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돕는 일을 오래 해보니 개인 또는 그룹이 성장과 즐거움을 모두 느끼도록 하는 것이야 말로 사람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부업으로 하고 있는 테니스 코치도 각자의 신체 능력, 시간 여건, 목표를 감안해서 성장과 재미 두 가지 토끼를 잡도록 하는 '사람을 돕는 일'이다.
회사에서 맡았던 역할 중 가장 어려웠지만 가치를 느꼈던 일은 대표를 돕는 일이었다. 인하우스 컨설턴트, 전사 전략 매니저, 전략고객 이사, CBO 등 돌아보면 팀원이었을 때나 임원이었을 때나 늘 대표를 돕는 역할을 맡았다. 대표도 성장과 즐거움이 필요하다. 대표가 더 성장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싶지만 겸손한 대표일수록 성장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그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즐거움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나는 이들이 본인의 역할을 200% 해낼 수 있도록 때로는 손이 되어주고, 때로는 머리가 되어 주었다.
컨설턴트는 조직을 돕는다. 내 경우도 회사 소속으로도 또 프리랜서로도 컨설팅 프로젝트 경험이 있다. 조직을 돕는 것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결국 컨설턴트도 사람을 돕는 일이다. 예를 들어 내가 진행했던 영업 조직 컨설팅 프로젝트의 경우도 그렇다. 컨설턴트가 A부터 Z까지 플랜을 기획하고 실행해 나가지만 결국 그 안에서 영업 조직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설득하고 교육하고 움직이게끔 해야 한다. 결국엔 각자가 컨설팅 프로젝트가 정말 본인 업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서 실행에 옮겨 결과를 이끌도록 도와야 한다.
사람을 돕는 일은 회사 밖에서도 흔히 이뤄진다. 내가 파트너로 수년간 있었던 HFK(Harvard Business Review Forum Korea)에서는 다양한 비즈니스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모임을 이끌었다. 각자의 전문 분야와 포지션은 달라도 '성장에 대한 목마름'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온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회사에서는 아무래도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 보니 내가 가진 것을 마음껏 퍼주기 어려웠지만 이곳에선 달랐다. 내가 다양한 회사에서 경험한 모든 것들을 마치 보석함에 감춰진 것을 꺼내 보여주듯이 공유했다. 지금은 그들이 회사의 리더로 성장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사람을 돕는 일의 희열을 느끼곤 한다.
다시 아내와의 대화로 돌아가보자. 아내는 '자기는 가장 잘하는 게 뭐지?'라고 물어봤지만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은 '가장 잘하는 걸로 어떻게 돈을 많이 벌 수 있지?'였을 것이다. 사람을 돕는 일의 취지는 너무 좋다. 하지만 그것을 부업이 아닌 비즈니스 형태로 발전시키는 일은 또 다른 영역이다.
테니스를 예로 들어보자. 현재 내 실력은 NTRP 4.0 수준으로 동호인 중에 상위 20% 정도에 해당한다. 거기에 캐나다 테니스 코치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고 개인 레슨도 해주고 있다. 너무 좋아하는 테니스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은 꽤나 큰 매력이다.
그래서 때마다 테니스를 가지고 어떻게 사업을 해볼 수 없을지 고민했다. 처음 생각했던 것은 테니스 인프라 부족으로 마음껏 테니스를 칠 수 없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캐나다 테니스 투어를 제공하는 서비스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캐나다에선 생소한 스크린 테니스 시설을 들여와서 개인 레슨과 직장인들 여가활동 수단으로 제공하면 어떨지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하지만 어느 것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렌트비가 치솟는 시장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좁은 공간에서 더 많은 수익을 거둬야 하는데 테니스는 상대적으로 많은 공간이 필요했다. 노력하면 어떻게든 사업을 해볼 수 있겠지만 확장성이나 지속가능성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코치만 해도 먹고살 수 있는 돈을 벌겠지만,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비즈니스로 확장하는 데는 리스크가 여전히 크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즉, 돈이 모이는 곳에서 사람을 돕는 일을 찾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본인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길 바라는 개인이나 조직은 정말 많다. 내가 잘하는 일이 '문제 해결'이라고 해보자. 어떤 문제든 그 문제를 정확하게 정의하고 근본 원인을 찾아내고,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실행으로 옮기는 일이 주특기라고 할 수 있다. 방법론만 잘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커리어를 통해 다양한 인더스트리를 경험했고 순서대로 홍보, 마케팅, 컨설팅, 전략, 운영, 데이터분석, HR, 재무 등을 해봤기 때문에 제대로 된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비즈니스로 확장하기 위해선 엄청난 리소스가 필요하다. 1인 컨설팅으로 시작하면 고민거리는 줄지만 당장 영업부터가 막막할 수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파트너와 협력하는 컨설팅 모델도 가능한데 이를 위해선 정말 각 분야에서 숨은 고수들을 모실 수 있는 섭외력이 중요해진다. 나의 넥스트 스텝은 아무래도 이 모델이 더 현실적이고 더 큰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가까워지고 있다.
아직 불확실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넥스트 스텝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사람을 돕는 일'을 할 것이란 사실이다. 그것이 내 커리어, 나아가 지금까지 내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불, 앞뒤 가리지 않고 내가 진심으로 했던 것이 바로 사람을 돕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사람을 돕는 일의 본질은 바로 사람이다. 우선순위가 사람이 아니라 돈이 되어 버리는 순간 사람을 돕는다는 말이 제대로 성립되기 어렵다. 너무나도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조직에게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면 족하다. 사람을 돕는 일의 특성상 진심은 언제나 통해서 더 좋은 결과가 언제든 따라오기 마련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의 신뢰를 잃는 것이 가장 두렵다. 돌이켜 보면 커리어에서 두 번 정도 신뢰를 잃는 느낌을 받았다. 한 번은 프리랜서로 지인이 부탁한 프로젝트를 하면서 퀄리티 있는 결과물을 내지 못했을 때였고, 다른 한 번은 협업을 약속했지만 개인 사정으로 흐지부지된 경우였다. 지금도 관련된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나에겐 아픈 경험이다. 이를 통해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다. 가끔은 신뢰를 핑계로 커뮤니케이션이 뜸하기 쉬운데, 신뢰를 위해서라도 시기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대화가 가장 중요하듯, 사람을 돕는 일에서도 대화,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건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하다.
지금이 커리어에서 겨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있을 것이다. 긴 겨울을 보낼 준비가 부족해서 춥게 느껴질 수도 있고, 다시 찾아올 봄을 맞이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심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가 가장 잘하는 게 뭐지?' 그리고 혹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조심스레 물어보자. '자기는 가장 잘하는 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