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말고 워라단
직장 생활은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단거리로 생각하고 뛰겠다던 많은 후배들이 여전히 나와 함께 마라톤을 뛰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단거리는 아니다. 단거리라고 하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끝장을 보겠지만, 마라톤은 요령 같은 것이 통하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다.
옆 자리의 선배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확실히 마라톤과 같은 직장 생활에서 몸과 정신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강을 관리하는 방법은 수만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모두가 한 번은 꼭 시도해보길 바라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확실히 선 긋고 시작할 필요가 있다. 바로 워라밸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워라밸은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부분이 있다. 누군가에겐 일(Work)과 개인 생활(Life)의 균형(Balance)을 맞춘다는 것은 장밋빛 환상처럼 들릴 수 있다. 그래서 난 각자가 컨트롤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바로 일과 개인 생활의 '단절'이다. 그리고 그걸 '워라단'이라 부르기로 했다. 워라밸은 내 의지로 지킬 수 없더라도, 워라단 만큼은 내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힘든 직장 생활 속에서 내 몸과 내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미리 고백하자면 작년과 올해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일과 개인 생활의 단절이었다. 작은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업무 생각, 회사 걱정을 하고 있다. 주말에도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월요일 아침이 밝아 온다. 최근 동병상련인 지인은 주말마다 회사 생각을 비우기 위해 캠핑장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불멍'을 한다고 했다.
일과 개인 생활을 단절시키기 위한 약간의 노력은 모두가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이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해보려는 것이다. 나는 이 방법을 '퇴사하듯 퇴근하기 입사하듯 출근하기'로 부르기로 했다.
직장인들은 몸만 퇴근하는 경우가 있다. 오랜만에 퇴사한 직원과 만난 저녁 자리에서도 같이 진행했던 프로젝트 에피소드를 안주 삼아 이야기 꽃을 피운다. 저녁 시간에 고객사로부터 카톡으로 업무 협조 요청을 받고는 읽을지 말지 고민한다.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라 혹시나 해서 랩탑을 들고 퇴근했지만 다음 날 그대로 들고 출근한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는 오늘 해결하지 못한 프로젝트 이슈로 '아, 내일은 어떻게 하지?' 생각하며 쉽사리 잠을 청하지 못한다. 임원은 임원대로 하루 24시간 회사 이슈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꿈에서 까다로운 고객사를 만나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몸은 퇴근했지만 정신은 회사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몸만 퇴근해서는 안되고 정신도 함께 퇴근해야 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바로 퇴사하듯 퇴근하기를 통해 가능하다.
하나. 퇴근할 때 퇴사하듯 회사와 단절하라
내 경우 세 번의 퇴사를 경험했다. 회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퇴사할 때 회사에 반납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회사 랩탑, 사원증, 법인카드, 법인폰 등이다.
회사 랩탑이 없으면 회사 정보 접근에 제한이 생긴다. 법인 카드가 없으면 업무상 비용을 사용할 수 없다. 사원증이 없으면 회사 건물 출입이 제한된다. 개인폰과 법인폰을 듀얼로 사용할 경우 법인폰이 없으면 업무 관련 전화를 받을 수 없다. 한마디로 퇴사를 하면 회사와 완전히 단절된다. 심지어 퇴사하면 회사가 있는 쪽은 쳐다도 보지 않는 이들도 있다.
퇴근할 때도 회사와 단절을 시도하자. 우선 랩탑은 사무실에 두고 퇴근하자. 매번 랩탑을 들고 퇴근하지만 실제 일하는 건 몇 번 되지 않는 것이 나만의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랩탑을 들고 퇴근하는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일까? 일종의 보험이다. 실제 사용할 일은 별로 없지만 만약에 이슈가 발생했을 때 빨리 대처할 수도 있고, 시간이 나면 급한 업무를 조금이라도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랜 직장 생활 동안 저녁에 랩탑을 열고 급히 일을 처리할 만큼의 이슈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더라도 요즘은 클라우드 접속을 통해서 급한 업무 처리가 가능하다. 업무가 많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워라밸은 어쩔 수 없어도 워라단은 지켜보자. 업무 마무리는 늦더라도 회사에서 하고, 퇴근할 때는 단절시키자.
외국계 회사를 다닐 때 모든 직원에게 법인폰과 함께 휴대전화 요금이 제공됐다. 내 경우 개인폰을 없애고 법인폰 하나만 사용했다. 그런데 일부 젊은 직원의 경우 개인폰을 없애지 않고, 법인폰과 함께 사용했다. 그리고 퇴근하면 법인폰을 껐다. 당시에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 의아했다. 아무리 그래도 법인폰을 꺼놓는 건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들이 옳았다. 법인폰을 꺼놓은 시간 동안 문제가 생긴 적은 한 번도 없었고, 팀단톡방이 있어도 업무 시간에만 잘 회신하면 문제가 없었다.
문득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신입사원 시절 옆팀 팀장님은 주말마다 회사에 나와서 책을 읽었다. 자녀들도 다 커서 주말에 집에 있는 것보다 회사에 나오는 것이 편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15년이 지난 어느 날 주말에 첫 회사 앞 도넛 가게에 들릴 일이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그 팀장님이 가게에 들어와서는 도넛을 사서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 15년 전에도 지금도 그분은 평일과 주말 내내 회사에서 살고 있다.
둘, 퇴근할 때 퇴사하듯 관심을 쏟을 곳을 만들라
퇴사할 때는 이직할 곳을 정해 놓고 퇴사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뉜다. 이직할 곳이 정해져도 며칠 또는 몇 주의 공백 기간이 주어지고, 정해지지 않은 경우도 일단 일정 기간은 쉬는 것이 보통이다. 짧으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리를 비우기도 하고 캠핑이나 여행을 하면서 휴식 기간을 갖는다. 더 좋은 곳에 가기 위한 퇴사든, 너무 힘들어서 하는 퇴사든, 퇴사는 유쾌할 수만은 없다. 그래서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퇴근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하루, 이번 한주를 돌아봐도 너무 힘들었던 순간, 씁쓸했던 순간, 갈등이 최고조였던 순간 등 다양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감정 소모가 클수록 퇴근할 때도 퇴사할 때처럼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 주위에서 퇴근 시간 대에 재충전을 잘하는 경우를 보면 크게 세 가지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퇴직하는 사람들이 하는 패턴과 비슷하다.
먼저는 운동. 주변의 개발자 직원들을 보면 거의 8~90%가 퇴근 후 운동을 한다. 이 모습이 신기한 건 개발자들이 누구보다 바쁜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퇴근하면 운동을 통해 복잡한 알고리즘이나 컴퓨터 관련 언어를 잊고 재충전을 한다.
다음은 사람. 퇴사하고 나고 나면 사람을 만나고 싶어 진다. 근황에 대해 얘기 나누고 싶기도 하고, 때로는 조언을 구하고 싶기도 해서이다. 그걸 통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야기 주제도 평소와 조금 다르다. 이전 회사 뒷담화나 힘든 이야기 등 지난 이야기보다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퇴근을 하고서도 가끔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보자. 스타트업에 다니는 친구도 만나고,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는 선배도 만나고, 자영업을 하지만 마음이 통하는 지인도 만나자.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취미. 퇴사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퇴사하면 세상에 하고 싶은 것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그런 것들을 꼭 퇴사하고 하려 하지 말고 퇴근하고 해 보자. 내 경우는 글쓰기가 그러하다. 회사 다닐 때 '내가 무슨 여유가 있다고 글을 써?'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아지면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4개월에 접어들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회사 업무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몰입을 하기 때문이다. 이 몰입이 주는 효과는 비단 글쓰기뿐 아니라 다른 모든 취미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회사 이외의 것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회사와 단절을 꾀할 수 있다.
셋, 퇴근할 때 퇴사하듯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를 하자
누구나 퇴사하면 다음 단계를 위해 준비한다. 이직할 곳이 정해진 경우든 그렇지 않은 경우든 새로운 분야와 회사에 대해 공부하고, 본인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보강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 회사 직원들의 경우, 개발자뿐 아니라 데이터 분석하는 직원들 역시 주말에 하루 정도는 본인이 원하는 분야를 공부한다. 젊기에 즐기고 싶은 것들이 많을 텐데도 회사 업무 연관성과 별개로 본인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꼭 알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 치열하게 공부한다.
미래를 위해선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 내가 준비하고 있는 것들이 그대로 미래에 현실화된다고 생각하면 현재를 허투루 보내지 못한다. 잘 아는 것과 대충 아는 것의 차이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100배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퇴사하듯 퇴근하기가 끝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우리는 또 무엇을 해야 할까?
퇴사하듯 퇴근하기를 했으니 당연히 그냥 출근해서는 안된다. 입사하듯 출근하기를 해야 한다. 퇴사 모드는 끄고 입사 모드를 켜기 위해서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 출근할 때 입사하듯 살짝 긴장하자
첫 회사 첫 출근날, 이직 후 첫 출근날을 기억한다. 경력직이어도 첫 출근하는 날은 늘 떨렸다. 직원들과 처음 만나는 것이고, 사무실과 내 자리도 처음이고, 심지어는 점심시간과 대화도 모두 처음이니 모든 것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긴장감은 떨린다고 생각하지 말고 두근거린다고 생각하자. 두근거림은 기대하는 것이다. 입사하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기대감을 갖고 출근하자.
어떻게 하면 살짝 긴장할 수 있을까? 내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 바로 집에서 출근 준비할 때 마음가짐(mindset)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사실 아침에 샤워하고, 면도하고, 아침 먹고, 옷을 입는 것이 별거 아니지만, 그 시간 동안 충분히 스스로 마음가짐을 다잡을 수 있었다.
둘, 출근할 때 입사하듯 하루를 미리 생각하자
입사하는 날은 아무 생각 없이 출근하지 않는다.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도 출근길에 하루를 미리 그려본다. 팀원들과 소개하는 미팅에서 어떤 말을 할지도 생각해본다. 만약 팀장 이상 포지션으로 첫 출근하는 것이라면 팀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도 미리 생각한다. 너무 디테일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생각해놓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출근할 때도 이와 같이 해보자. 내 경우 출근하면서 캘린더를 확인한다. 오늘은 어떤 미팅이 잡혀 있는지 살펴보고, 사전 점검이 필요한 미팅이 없는지 판단한다. 어떤 미팅은 참석만 해도 되지만, 일부 미팅은 사전에 내가 꼭 진척 사항을 체크해야 한다. 출근할 때 이 정도 생각만 하고 출근해서 사무실에 도착해 메신저를 통해서 해당 직원들에게 이 부분을 체크한다.
생각은 자유다. 심지어는 하루 일과를 쭉 그려볼 수도 있다. 오늘 하루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지, 그렇지 않을지도 생각해둘 수 있다. 그러면서 최악의 상황일 때 내가 취해야 하는 행동이나 대안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두면 든든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셋, 출근할 때 입사하듯 컨디션을 100%로 끌어올리자
첫 출근 날은 늘 컨디션이 좋았다. 물론 신입사원 때는 잠을 설치면서 출근하기도 했지만, 신기하게 신입시절이든 경력직일 때든 첫날은 늘 컨디션이 최고였다. 이유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 같다. 처음이니까, 잘해야 하니까, 설레니까, 몸이 알아서 컨디션을 올려준다고 생각한다.
출근할 때도 컨디션을 100%로 끌어올리자. 출근하는 직원들을 바라보면 딱 두 부류다. 비타민과 같이 활기차게 컨디션 100%인 얼굴과 요새 힘들다는 메시지를 마구 날리는 컨디션 0%인 얼굴이다. 후자의 경우를 보면 컨디션을 100% 끌어올리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혼자서 올릴 수 없으니 주변 사람들을 찔러보기도 한다. 이 두 부류는 하루의 출발선이 서로 다른다. 먼저 출발선에 서는 사람이 당연히 먼저 퇴사하듯 퇴근할 수 있다.
직장인은 피곤하다. 때문에 퇴사하듯 퇴근하고 입사하듯 출근하는 것도 피곤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회사와 개인 생활이 단절된다면 몸과 정신 건강이 좋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수 만 가지 방법 중에서 퇴사하듯 퇴근하기 입사하듯 출근하기를 한 번쯤은 시도해보자. 이건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