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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수험생 jcobwhy Nov 18. 2022

나이 많은 세탁기와 건조기

D+105 (nov 14th 2022)

한국에 있을 때 미국에서 살 집을 보면서 유념하면서 체크했던 것들 중에 하나가 집에 주요 가전제품들이 잘 갖추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선 거의 대부분의 집에 가전제품을 사거나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이 마련해 들여와야 하지만, 미국에선 세놓는 집의 경우에는 주방 가전은 완전히 갖추고 있는 상태에서 세를 놓는다. 그래서 부동산 앱이나 사이트의 공고문 내용을 보면 가전제품은 무엇이 있는지, 언제 교체했는지, 얼마나 새 거인지 써 놓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글을 보면 흰색 주방가전 완비, 은색 주방가전 완비, 이런 식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은색 주방가전이라고 하면 아, 가전제품이 신형으로 마련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기본적으로 스토브 탑, 오븐, 전자레인지, 냉장고, 식기세척기와 같은 주방 가전은 신형이든 구형이든 거의 다 갖추고 있는 반면, 세탁기와 건조기가 없는 집은 의외로 많다. 세탁 시설이 없는 집의 경우에는 아예 세탁기를 설치하는 공간이 없는 집도 많다. 아, 물론 거의 아파트 한정이다. 이런 아파트에는 공용 세탁실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프렌즈나 빅뱅이론과 같은 시트콤에 나오는 세탁실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과거 아내와 처음으로 구했던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첫 신혼집과 뉴저지 이사 후 구했던 아파트 모두 집 안에 세탁기, 건조기가 없고 공용 세탁실만 있었다.


이번에 집을 구하면서는 꼭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는 집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빨래를 하기 위해 매번 공용 세탁실을 가는 것이 꽤나 귀찮았다. 빨래는 보통 많으면 매일,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하는데, 세탁실이 따로 있으면 세 번을 왔다 갔다 해야 한다. 빨래를 가지고 빨래를 돌리러 한번, 빨래가 끝나면 건조기로 옮기러 한번, 건조가 끝나면 빨래를 갖고 오러 한번, 이렇게 세 번이다. 공용 세탁실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시간에 놔뒀다 가지고 올 수도 없고, 빨래 돌리는 사람이 많으면 허탕 치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에 아파트 공용 세탁실은 공짜가 아니다! 세탁, 건조 돌릴 때마다 2불씩 들었는데, (세탁 1불, 건조 1불, 2010년대 이야기긴 하다) 심지어 25센트(쿼터) 동전으로 준비하기까지 해야 했다. 그래서, 꼭 집 안에 세탁기가 있는 집으로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 계약한 것이 바로 이 집이었다. 가전제품도 잘 갖추고 있고, 냉난방 시설 잘 되어있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세탁기와 건조기가 다용도실에 있다! 그런데, 아주 오래된 세탁기와 건조기다. 디자인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나보다 많이 어리지 않아 보였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오래돼 잘 돌아가지 않던 선풍기와 동급생처럼 보인달까? 30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세탁기와 건조기가 부엌 안쪽의 다용도실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미국에 살면서 세 들어 사는 집, 혹은 아파트에 저렇게 오래된 가전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그렇게 낯선 모습은 아니다. 미국에 정착하고 3~4년이 지나 한국에 왔을 때 너무 새것처럼 보이는 가전제품이 집에 있는 것을 보면 오히려 어색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 흔히 보는 디자인의 드럼 세탁기, 건조기가 마련된 집이나 세탁실이 있는 집에 살아본 것이 몇 번 되지 않으니까.


세탁기, 건조기라는 것이 사실 그 기술과 기능, 역할로만 본다면 대단히 첨단 기술을 활용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에 제대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30년이 된 제품이라 하여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온갖 AI 기술이 접목된 지금의 세탁기라 해도 사실 그 궁극의 작동원리는 통 안에 세탁물과 물, 세제를 원활히 넣어 모터 기술로 좌우로 힘껏 돌려 세제와 세탁물의 마찰을 도와 세탁이 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오래된 세탁기라 하더라도 그 기능만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집에 있는 이 나이를 알 수 없는 30대의 세탁기와 건조기는 여전히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 뭐 사실, 그렇기에 이 아파트에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다. 만약 작동을 하지 않는다면 관리 사무소에서 새 세탁기로 교체했겠지. 문제는 그 소리가 매우 남다르다는 데에 있다. 세탁기는 그래도 참을만하다. 한국에서 간간히 보았던 구형 통돌이 세탁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그 친구도 우리 집에 있는 친구보단 한참 어리다) 하지만 건조기는 그야말로 꽥꽥 거리며 소임을 다한다. 이사 온 첫날 2박 3일 동안 쌓인 빨래를 하는데, 건조기를 돌리다가 깜짝 놀라 작동을 중지시켰다. 관리사무소에 이야기해 봤지만 정상이라고 한다. 건조 기능 자체엔 문제가 없다.


꽥꽥대는 건조기를 사용한지도 벌써 100일이 넘게 지났고, 건조기를 적어도 5~60번은 돌린 것 같다. 너무 시끄러운 통에 짐에 운동을 하러 가거나, 아이, 아내를 픽업하는 시간 동안에 건조기를 돌리려 노력한다. 하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영상 작업을 하거나 글을 쓰는 동안 건조기를 돌릴 때도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꽥꽥, 삐걱삐걱 대는 소리가 거의 한 시간여 계속되었다가 방금 그 소리를 멈췄다. 고요한 정적. 원래 이렇게 조용했나 싶다. 어느덧 그 소리에 익숙해져서 영상 편집에도 글쓰기에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한국에서 늘 보던 세탁기나 건조기가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간다면, 아마도 꽤나 시간이 지난 후가 될 듯싶다. 당분간은 단독주택에 세를 살기도, 집을 구매하기도 그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미국 생활에 대한 적응도 딱 그만큼이다. 건조기의 비명 소리가 일상을 방해하지 않는 만큼. 불편함을 감수하는 만큼이 적응의 척도가 아닐까 싶다.


Photo by Zachary Keimig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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