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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국 방구석 주부 Sep 30. 2022

페런하이트와 마일, 그리고 파운드

D+57 (sep 27th 2022)

일상생활 안에서 단위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인간은 교육과 사회생활을 통해 특정 숫자에 감정과 기분 척도를 달리하는데, 이 특정 숫자 뒤에는 늘 단위가 따라붙는다.


의외로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단위는 돈 단위이다. 특정 휴대폰 브랜드가 150만 원이 넘는다며 비싸다고 생각하고, 사과 한 박스가 15,000원이면 싸다고 생각한다. 연봉이 1억이 넘으면 성공했다며 부러워하기도 하고, 모 직종에서는 실수령 월급이 200만 원이라며 분통을 터뜨린다.


거리나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도 마찬가지다. 키가 180이 넘으면 훤칠하다고 생각하고, 100km 거리는 굉장히 멀다고 느낀다. 50m 정도 거리에 있다고 하면 거의 다 왔다는 걸 알 수 있고, 책상의 길이가 1,800mm라는 설명에 살지 말지를 고민한다.


무게는 또 어떤가? 고기 한 팩이 300g이면 세 식구가 먹기엔 좀 부족한 느낌이고, 남자 몸무게 80kg이 넘으면 살을 빼야겠다고 생각한다.


길디 긴 서론을 보며 뒤이어지는 이야기는 뻔하리라 예상하실 거다. 세상만사를 재는 단위를 홀로 다른 단위로 쓰는 나라. 미국이다.


돈 단위는 매일 생활에서 영향을 워낙 많이 주니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단위지만, 사실 돈 단위야 미국이 아니라 어느 나라를 가도 다 다르니 미국만의 불편함을 야기하는 단위는 아니다. 다만 외국인으로서 환율에 영향을 받다 보니 미국이 물가가 그대로라도 나한테만 물가가 너무 많이 오르고 있는 점은 슬프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게 처음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단위는 금방 익숙해졌다. 거리를 나타내는 마일은 km의 1.6배인데 얼추 1.5배 계산하면 거의 맞는다. 마일은 거리도 많이 보지만 자동차 속도도 많이 보는데, 도심 제한 속도는 통산 40 mph, 국도 55 mph, 고속도로 70 mph다. 인치, 피트도 2.5cm, 30cm로 얼추 계산하면 되는데, 미국에선 거리두기가 6피트다. 6피트, 10피트 정도의 거리 느낌은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다.


파운드는 과일이나 육류의 무게, 체중 등에서 많이 쓰게 되는데, 고기 1파운드는 한근이 좀 못되고, 체중은 보통 kgX2.1배 정도인데 숫자가 너무 커서 깜짝 놀라는 경우는 있다.


그전 6년에 가까운 미국 생활에도 적응이 안 되는 하나의 단위가 있었으니, 그것은 화씨다. 온도는 생활환경과 신체 활동에 큰 영향을 주는 단위이다. 추우면 옷을 덧입고 활동량을 줄이며, 더우면 수영장 나들이를 계획하고 짧은 옷을 준비한다.


덥고 추운 것은 꽤나 직관적이라, 온도의 숫자보다는 몸이 느끼는 것을 더 정확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생각보다 온도는 숫자로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30도가 넘는 낮 기온이 예보되면 오늘은 덥겠구나 생각한다. 갑자기 아침 기온이 15도로 뚝 떨어진단 소리에 내일은 스웨터를 입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직접 느끼지 않더라도 숫자에 나의 기분과 느낌이 이미 담겨 있다.


미국은 우리나라와는 다른 기온의 척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셀시우스, 섭씨라 불리는 온도 척도를 쓰지만, 미국에선 페런하이트, 화씨라는 온도 척도를 쓴다. 섭씨와 화씨는 그 변환 방법도 굉장히 직관적이지 않는 편이라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적응하기 힘든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두 온도의 척도가 숫자가 우리가 온도를 사용하는 범위에서는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계산법에 따라 두 온도가 만나는 지점은 영하 40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지 않는 범위의 온도기 때문에 잘 감이 오지 않는다. 기준이 0도 아녀서 비율을 가늠하기 어렵다. 화씨로 10도 차이는 대략 5~6도 정도인데, 0을 기준으로 그렇게 달라지는 게 아니다 보니 가늠하기가 어렵다.


또 다른 하나는 섭씨가 생활에서 더 직관적인 온도 숫자를 갖고 있기 때문에 화씨를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 섭씨는 물이 어는 온도와 끓는 온도가 각각 0도, 100도로 일상에서의 기준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화씨는, 어… 음… 읽어봐도 문과인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쨌든 잘 이해가 되는 척도에서 이해가 어려운 척도로 기준을 바꿔야 하니 더 습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 개인적으로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으니, 원래 살던 북 캘리포니아 지역은 사계절 기온의 변화가 크지 않은 지역이어서, 온도를 잘 보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적응하기가 더 쉽지 않았다. 사계절 내내 영상 5도에서 20도 안팎의 기온을 유지하곤 했다. (물론 요즘은 이상기온으로 올해는 30도가 훌쩍 넘는 날이 꽤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기온을 특별히 보지 않아도, 늘 긴팔 재킷은 챙기고, 안엔 반팔 티셔츠를 입는 식으로 옷을 입었다. 비도 안 와서 일기예보도 안 보니, 기온에 정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 북동부에 위치한 이곳에 정착하고 나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이곳 겨울이 춥다는 말을 워낙 많이 들어 얼마나 추운지 현지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많이 추울 거야. 보통 낮에는 30도 정도 하고, 밤에는 10도까지 떨어지기도 해. 엄청 춥지?’


‘엥? 뭔 말이여? 아, 미국에선 화씨를 쓰지. 근데 이게 추운 거야, 아닌 거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추운 거다. 32도가 섭씨로 0도여서 낮에도 영하에 머문다는 말이고 10도는 대략 영하 12도쯤 되니까. 무지 추운 거지. 문제는 바로 직관적으로 뇌리에 꽂히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온도는 몸으로 느끼는 거라, 숫자로 들어도 몸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 (마치 레몬이라는 단어 만으로 신 느낌이 들듯) 화씨는 그런 느낌이 전혀 안 온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엔 10도 안팎, 더운 한여름엔 90도 중반에 이르는 이곳 날씨. 추우면 영하 10도에 더우면 30도 중반에 이르는 서울 날씨처럼 온도의 숫자만 들어도 덥고 추운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질 수 있을까?


집의 온도계는 화씨로 바꾸어 놓았지만, 아직도 내 휴대폰의 온도 단위는 섭씨다. 쌀쌀해진 오늘 저녁, 히터 온도를 72도로 맞춰 놓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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