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약 1년 반동안
애매한 관계를 지속했던 남자가 있었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귀지 않는 것도 아닌
정의되지 않는 관계.
속으로는 수백 번도
'우리는 대체 무슨 사이야?'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런 관계 정립을 은근히 회피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질문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왠지 모르게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늘 불안한 마음을
디폴트 값처럼 안고 지냈다.
확인욕구, 인정 욕구가 커지면서
내가 제대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집착적인 마음도 조용히 커져갔었다.
기대 → 불안 → 확인 → 안도감 →
다시 기대 → 실망 → 보상 → 다시 기대
가끔은 기대했던 마음이 보상받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그 기대가 그대로 실망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이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중독처럼 반복됐다.
내가 점점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관계를 끊지 못한 채 몇 달을 더 지속했다.
그리고 그렇게 연락을 끊은 지
한 달이 되어 간다.
연락을 끊고도 마음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내가 연락을 하지 않는 이 상황에서
그 사람은 어떤 마음일지,
혹시 나를 보고 싶어 하지는 않을지,
생각이 나긴 할지
계속해서 궁금했다.
뜬금없는 얘기지만
한 2년 전쯤부터 나는
'끌어당김'을 믿기 시작했었다.
조금은 말하기 부끄러운 마음이지만,
이 사람을 끌어당겨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갔다.
연락이 끊겼지만 여전히 그가 나를 원하길 바랐던 마음에서였다.
원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그 감정을 느끼면
그 상황을 현실로 끌어당길 수 있는 우주의 법칙
참 언제 봐도 매력적인 말이다.
실제로 나는 몇 번 이렇게
원하는 것을 끌어당긴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간절하지만 방법이 없으니 생각이 났다.
그래, 특정인 끌어당김. 한번 해보자! 하며
가장 일상적인 장면을 떠올리고
그 감정을 느끼는 연습을 했다.
그런데 그 상상을 하던 중
갑자기 깨달은 게 있었다.
그 깨달음이 너무 단순해서,
너무 특별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더 허무하게 느껴져서
한 30분은 이게 맞나 멍 때렸던 것 같다.
'아 나는 이<사람>이 아니라
이 <감정>을 원하는 거였구나.'
연애를 했을 때 느끼는
안정감, 든든함, 사랑받는 느낌, 연결감.
나는 사실 이 사람과의 연락이나
관계정립 자체를 원한게 아니라,
그 감정을 느끼고 싶었던 거였다고.
당연히 처음엔 그냥 걔랑 사귀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그 감정을 오래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집착으로 변질되었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항상 걔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지
'내가 원했던 마음이 뭔지'에 대해,
나의 시선에서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는 신기하게도
딱히 이 사람을 끌어당겨야겠다는
강한 생각이 줄어들었다.
내가 원했던 안정감, 사랑받는 느낌은
내가 과하게 욕심낸 감정이 아니라,
평범한 연애를 원하는 사람이
당연하게 느끼고 싶어 하는 마음일 뿐인데
이 감정 하나 느끼지 못해서
내가 이렇게 힘들었나 싶으니
허무한 감정이 가장 크게 느껴졌다.
물론 감정을 깨우쳤다고
바로 생각이 안나진 않는다.
1년 반 넘게 매달려 있던 뇌 중독(?) 회로 인해
정서적 여운과 기대의 습관이 아직 남아있다.
하지만 생각이 날 때마다
'나는 안정감을 느끼고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떠올리다 보니
그 감정조차 줄 수 없는 사람에게
내가 굳이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감정의 소음이 작아진다.
우리는 종종
어떤 대상을 너무 갖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 대상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느끼고 싶은 감정을
원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마음도,
사실은 돈 종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돈이 주는 안정감과 여유를 원하는 것이고,
좋은 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 역시
집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그 안에서 느끼고 싶은
안정과 안심, 인정욕구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깨달은 이것 또한 같은 맥락 아닐까.
그 사람을 원했던 게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느끼고 싶었던 마음을 원했을 뿐이니까.
그래서 요 며칠째 나는
오랫동안 그 사람을 통해서 내가 느끼고 싶었던 감정을
나 자신에게 어떻게 채워줄 수 있을지
생각하며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