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 아파트는 열풍, 우리 아파트는 멈춤

로제의 아파트와 우리 아파트의 차이

by 기록습관쟁이


30년이 넘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도 세월 앞에서는 한낱 먼지처럼 낡아갈 수밖에 없다. 처음 이 집에 발을 들이던 날이 떠오른다. 아이가 태어나던 무렵이었다. 맞벌이를 하던 우리 부부는 처가 근처로 집을 구하러 다녔다. 아이가 유치원에 갈 정도까지만 신세를 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2016년의 부동산 시장은 우리에게 너무나 냉정했다. 전세 매물은 씨가 말랐고, 매매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매매까지는 생각 없는데..."라며 포기하고 돌아서던 날이 몇 번씩 반복됐다. 그러다 결국 처가에서 5분 거리의 오래된 아파트를 매매하기로 결정했다.


리모델링을 끝낸 새 집은 또 다른 세계 같았다. 낡은 외벽과는 대조적으로 화이트와 블랙의 깔끔한 실내는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거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 있으면 그 어떤 걱정도 잊을 수 있었다. 아이도 반려견도 그 공간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5년의 시간이 흐르자,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작은방 창문 위에서 빗물이 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베란다 양옆에서도 비가 들이쳤다. 비가 적게 오면 괜찮았지만, 폭우가 쏟아질 때는 매번 걸레를 들고 허둥대야 했다. "아니, 이게 왜 이래?" 아내와 나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외벽 보수를 위한 페인트 작업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혹시 누수가 해결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페인트칠이 끝난 뒤 벽을 바라보며 병든 몸에 새 옷을 입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젠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누수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넣어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누수 보수작업을 진행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라 믿었던 것들

그때 나는 직장 이직 때문에 지방으로 2년간 집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보수공사를 직접 챙길 수는 없었지만, 돈을 냈으니 당연히 해결되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날, 나는 여전히 비가 새는 벽을 마주해야 했다.


관리사무소에 다시 문의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너무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기대감이 무너졌다. 내가 그토록 믿었던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던가.


관리소장과 다시 대화를 나누며 나는 주변 세대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우리 집 말고도 하자가 있는 세대가 많나요?"

"많습니다. 하지만 추가 비용을 내고 보수하려는 집은 거의 없습니다."

"왜요? 다들 이렇게 불편하게 사는 걸 감수한다고요?"

소장의 말은 냉혹했다. "다들 관리비도 줄이고 싶어 하는데요, 추가 비용을 지불할 리가 없죠."


그들은 대부분 60대에서 80대의 어르신들이었다.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그들은 이미 이 환경에 적응해 버린 것처럼 보였다. 벽이 새고, 창문이 흔들려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아니,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삶을 단순히 비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의 태도가 이곳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처럼 느껴졌다.


아파트, 단순한 공간 그 이상

최근 블랙핑크의 로제가 발표한 신곡 '아파트'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8비트의 록킹한 빠른 템포, 브루노 마스와의 협연, 그리고 영어 가사로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전략까지. 무엇보다 "아파트, 아파트"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중독적인 멜로디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모두가 흥겹게 이 노래를 듣고 즐기며 일상을 활력을 얻고 있다.


로제는 이 노래가 자신이 즐겨하던 '아파트 게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나는 이 곡의 가사를 들으며 다른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생활공간으로만 여겨졌던 아파트가 이 노래에서는 파티와 자유로운 교류의 공간, 그리고 일탈과 즐거움의 장소로 변모해 있었다. 디지털 세상이 아닌 실제 만남과 소통을 상징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달까.


그렇다면, 내가 사는 이 오래된 아파트는 어떨까? 단순히 건축물의 노후화 문제를 넘어, 이곳의 노령화된 주민들과 함께 갇힌 사고의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아파트라는 공간이 교류와 소통의 장이 될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단절과 고립을 상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멈춰버린 생각들

이 아파트에는 나만의 작은 낙원이 있었다. 낡은 외벽 너머에는 아이가 웃고, 반려견이 뛰노는 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아파트라는 커다란 구조물은 개인의 의지로는 바꿀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관리사무소는 인력이 부족해 집집마다 방문할 여력이 없다고 했다. 방송으로 공지를 해도 대다수가 이를 흘려버렸다. 손해는 고스란히 세대주들에게 돌아갔지만, 정작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왜 이러고 사는 거지?"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비용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관리비가 더 오를까 두려워했고, 삶의 변화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보였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멈춰 있었고, 생각도 멈춰 있었다.


관리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곳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바란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작은 변화도 두려워합니다." 그의 말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바뀔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이곳에서 배운 것은 '멈춤'이라는 단어의 무게였다. 노후된 아파트는 단순히 낡은 건물이 아니라, 멈춘 생각과 멈춘 삶을 상징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이 환경에서 무언가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과연 이게 끝일까?


아파트의 누수는 비단 물만을 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내가 무언가를 흘려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변화를 두려워하며 나도 모르게 멈춰 서 있는 건 아닌가?


이제는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가려 한다. 오래된 것을 되살리는 힘은 결국 변화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 그 작은 시작이 언젠가 더 큰 변화를 만들기를 바라며 나는 이 이야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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