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의 주문이 엔지니어의 삶에 던지는 질문
뼈 때리는 한 마디, 코트 밖으로 날아오다
최근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에서 대한민국 배구의 살아있는 아이콘, 김연경 감독이 선수들에게 던진 한 마디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바로 "생각하고 플레이해라." 경쟁에서 밀려나거나 슬럼프에 빠진 선수들을 모아 다시 코트에 세우려는 그 거인의 주문은, 사실 컴퓨터 앞에서 8시간째, 에러와의 씨름을 하고 있는 나 같은 평범한 엔지니어에게도 뼈를 때리는 듯한 가르침이었다.
플레이는 비단 배구 코트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행위, 맡은 프로젝트를 설계하는 행위, 심지어 배우자의 잔소리에 대처하는 행위까지, 이 모든 것이 우리 삶의 플레이다. 그리고 김 감독의 주문처럼, 그 플레이의 질은 생각의 유무와 깊이에 따라 극적으로 달라진다.
유쾌하게 살고 싶은 월급쟁이 엔지니어로서, 나는 이 생각의 끈이 어떻게 우리 일터와 삶의 전반적인 시스템 아키텍처를 개선할 수 있는지 진지하지만 재미있게 파헤쳐 보려 한다.
보고서 코트의 복붙 : 직장인의 지적 부채
나를 포함한 모든 직장인의 코트는 바로 보고서와 프레젠테이션이다. 우리의 플레이란 곧, 우리가 만들어내는 문서의 논리와 설득력이다.
생각이 없는 플레이의 전형이 무엇일까? 바로 복사-붙여 넣기(Copy-Paste)다. 지난 분기 보고서, 혹은 3년 전 유사 프로젝트의 문구를 깊은 고민이나 맥락 파악 없이 가져와 붙여 넣는 순간, 우리는 지적 부채(Intellectual Debt)를 안게 된다. 당장은 문서를 빠르게 완성했지만, 그 안에 담긴 오래되거나, 현 상황과 맞지 않는 데이터나 논리는 미래에 책임이라는 악성 부채로 돌아온다. 나중에 윗분들이 "이 데이터는 지금 상황과 맞지 않잖아?"라고 물을 때, 며칠 밤을 새야 하는 변명의 악몽이 시작되는 것이다.
김 감독의 말처럼, 배구 선수가 상대 팀의 블로킹 타이밍, 수비 위치를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강타만 날린다면 어떻게 될까? 십중팔구 막히거나 범실로 이어진다. 직장인도 마찬가지다. 청중이나 보고 목적을 생각하지 않은 '강타 복붙'은 공감을 얻지 못하고 기각당한다.
"이번 보고서의 핵심 청중은 마케팅팀이다. 3년 전의 생산량 데이터는 빼고, 시장 점유율 데이터와 분석을 중심에 둬야겠다." (생각하는 플레이)
"일단 포맷은 채웠네? 그럼 됐지 뭐. 나중에 회의 때 누가 지적하면 그때 고치겠지." (생각 없는 플레이)
생각은 복잡한 전략을 짤 때만 필요한 게 아니다. 동료에게 이메일을 한 통 보낼 때도,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이 오해할 여지는 없을까. 핵심 내용은 맨 앞에 두는 게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생각의 끈을 놓지 않는 플레이다. 이는 곧 협업의 질, 즉 우리 팀의 플레이 수준을 끌어올린다.
생각의 끈을 꼬는 세 가지 도구
생각하고 플레이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코트 밖에서 꾸준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 훈련 도구는 다름 아닌 독서, 글쓰기 그리고 '복기'이다.
1. 독서: 책의 뼈를 발라내는 생각
우리는 보통 책을 읽을 때 빨리 끝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김 감독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그저 공을 받는 흉내만 내는 것과 같다. 진정한 독서는 저자가 던진 생각의 공을 받고, 그 공의 궤적을 예측하며, 내가 가진 지식의 코트 어디에 떨어뜨려야 가장 유효할지 고민하는 과정이다.
생각 없는 독서 : 활자를 눈으로 훑고 "아, 재밌었다."로 끝. 다음 책으로 바로 넘어감. (결과: 남는 것 없음)
생각하는 독서 : "이 작가는 왜 이 문장을 썼을까? 이 핵심 주장이 내가 겪은 5년 전 그 사건과 연결되지 않나? 그럼 이 주장을 내 업무에 적용하면 어떨까?" (결과: 새로운 통찰, 응용력 향상)
책 한 권을 천천히 읽더라도, 그 책의 핵심 아이디어와 나의 삶을 촘촘하게 엮어주는 것이 바로 생각의 끈이다.
2. 글쓰기: 생각을 조립하다
나 같은 엔지니어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은 잘 되어 있지만, 그 생각을 언어라는 형태로 구조화하는 일에는 서툴기 쉽다. 하지만 글쓰기야말로 흩어진 생각의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으로 조립하는 최고의 훈련이다.
"내가 뭘 쓰려고 했지?"라는 질문에 막힐 때, 그 순간이 바로 생각의 끈을 찾아야 할 때다. 글쓰기는 머릿속에서 막연하게 떠다니던 개념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들을 논리적인 순서로 배열하여 하나의 완성된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과 같다. 머릿속에 복잡할수록, 글을 쓰자. 혼란스럽던 마음이 정리가 되는 마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3. 복기: 승패를 초월하는 성장의 묘약
김연경 감독이 선수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아마 경기 복기일 것이다. 단순히 이겼는지 졌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때 왜 그렇게 판단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엔지니어의 삶으로 치환하면 이렇다.
업무 복기 : "왜 그 오류를 이틀이나 잡았을까? 처음에 잘못된 가정을 했기 때문이다. 다음번에는 A라는 검증 단계부터 시작해야겠다."
인생 복기 : "그때 그 중요한 미팅에서 내가 왜 말을 제대로 못 했을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머릿속에서 생각의 끈이 꼬여서 말로 나오지 못했다."
복기는 실패를 곱씹는 것이 아니라,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여 미래의 승률을 높이는 최고의 전략 회의다.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복기하는 습관이야말로 나를 어제보다 나은 플레이어로 만든다.
추상화의 미학: 생각으로 복잡성 다스리기
엔지니어링의 본질은 복잡성과의 싸움이다. 눈앞의 거대한 문제를 보며 숨이 막힐 때, 우리의 생각의 끈은 가장 빛을 발한다. 바로 추상화라는 도구를 사용할 때이기 때문이다.
추상화는 복잡한 시스템의 핵심 기능만 남기고 불필요한 세부 사항을 숨기는 기술이다. 마치 배구 선수가 상대의 수많은 움직임 속에서 '저 선수는 중요한 순간에 반드시 크로스 공격을 한다'는 하나의 패턴만 추출해 내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배구 코트에서의 추상화는 상대팀 10개의 전술을 3개의 핵심 패턴으로 단순화하여 예측한다. 엔지니어링에서의 추상화는 장비 간에 연결된 복잡한 매칭 구조를 핵심 로직에 따라 5개 내외의 깔끔한 모듈로 분리한다.
생각의 끈을 단단히 잡는다는 것은, 눈앞의 버그(Bug)나 난관에 매몰되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 즉 가장 높은 수준의 추상화된 문제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 깊은 생각 덕분에 장비 결선도는 심플해지고, 시스템은 견고해지며, 우리 플레이는 혼란 속에서도 질서를 찾게 된다. 복잡한 일을 단순하게 만드는 이 과정이야말로 엔지니어의 가장 큰 쾌감이며, 생각하고 플레이하여 얻는 미학적 승리다.
결론: 가장 위대한 플레이는 '나를 위한 생각'
김연경 감독은 선수들에게 생각을 주문했지만, 그 생각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생각이기도 하다. 내가 왜 이 경기를 뛰는지, 이 동작이 나의 커리어에 어떤 의미인지.
우리 삶의 모든 플레이 역시 마찬가지다.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주어진 일에 치여 가장 중요한 나를 위한 생각을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코트에 서 있다. 연봉 협상, 새로운 기술 학습, 건강 관리, 가족과의 관계 개선 등 모든 것이 치열한 플레이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뛰어난 점프 능력이나 강한 스파이크가 아닐지도 모른다.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바로 생각의 끈을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는 끈기이다.
내일 아침 출근길에, 혹은 새로운 일을 하기 전에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생각하고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 하나가 당신의 삶과 경력을 가장 위대한 승리로 이끌 강력한 스파이크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우리 모두 생각의 끈을 놓지 않는 멋진 플레이어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