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필은 붓을 안 가려도, 기술자는 공구를 가려야 한다
한창 업무에 집중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팀 동료이자 선임인 박 차장님이 나를 불렀다.
"다음 주에 울산 지원 갑니다. 일정 비워 두세요."
갑작스러운 지방 출장. 나는 습관처럼 CCTV 시스템 설치 작업 내역서를 훑었다. 보안시설 출입구 3곳에 카메라 9대와 녹화기 3대 설치. 어림잡아도 최소 이틀, 넉넉잡아 3일은 비워둬야 할 견적이 나왔다.
출발 당일, 나는 박 차장님에게 물었다. "부자재는 뭘 챙겨야 할까요?" "현장 사람들이 다 챙겨놨겠죠. 기본적인 개인 공구만 챙겨 갑시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우리 팀 울산 상주 직원들이니 알아서 준비해 뒀으려니 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개인 짐과 간단한 공구 세트, 그리고 작은 사다리 하나만 챙겨 울산행 차에 몸을 실었다.
점심시간 즈음 울산에 도착했다. 현장에 상주하던 이 과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아이고,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지요?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뒤로하고 곧장 현장을 둘러보며 장비 검수에 들어갔다. 첫 번째 포인트에서 케이블 동선을 파악하던 중, 첫 난관에 봉착했다. 울산 팀의 이 과장과 서 부장님이 미리 파악해 뒀을 거라 믿었던 배관 경로는 엉망이었다. 우리는 끙끙대며 벽의 덕트와 바닥 마감재를 뜯어내고 내서야 케이블 노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이거. 벽을 바로 관통한 게 아니었네." 서 부장님이 혀를 찼다. 벽을 사이에 두고 뚫려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구멍은 없었고, 매립된 배관은 엉뚱하게도 천장과 바닥을 향해 있었다.
"이거 천장으로 올라간 것 같은데요?" 시작부터 삐그덕거렸다. 한참을 뒤진 끝에(사실 내가 찾았다), 천장으로 올라간 배관이 굽어져 바깥 풀박스로 연결된 것을 겨우 찾아냈다. 위치도 잡혔고 길도 찾았으니 이제 속도를 낼 차례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보안실 안에서 바깥으로 선을 빼내려는데 벽이 심상치 않았다. "뭐야 이거. 대리석이네? 왜 이렇게 두꺼워?" 일반 콘크리트가 아닌, 두께가 상당한 대리석 마감벽이었다.
"서 부장님, 해머 드릴로 뚫죠."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황당했다. "해머 드릴 없는데? 너희가 챙겨 왔어야지."
기가 막혔다. 작업 내용을 뻔히 알면서 현장에 장비 하나 없다니. 서 부장님은 본인들이 가진 공구가 몇 없다며 되레 우리 탓을 했다. 그럼 이 돌덩이를 뭘로 뚫으란 말인가. 그는 태연하게 자신이 쓰던 전동 드릴을 건넸다. "이거 써봐. 해머 기능 있으니까 될 거야."
울산까지 와서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전동 드릴을 대리석에 갖다 댔다. 드르륵, 드르륵... 위잉...
예상대로였다. 대리석은 뚫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해머 드릴은 망치처럼 타격하여 구멍을 '뚫는' 장비고, 전동 드릴은 나사를 '돌리는 공구다. 기능 자체가 다르다. 아무리 해머 기능이 달린 전동 드릴이라 한들, 그 약한 힘으로 두꺼운 대리석을 뚫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었다.
나와 박 차장님은 혼신의 힘을 다해 드릴 비트(날)를 대리석에 비벼댔다. 그렇다. 이건 뚫는 게 아니라 돌을 '갈아내는' 것이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야 하는 것이 월급쟁이의 비애던가. 우리는 영혼을 불태우며 대리석을 갈고 또 갈아, 기어코 구멍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장비 하나만 있었어도 1분이면 끝날 일을.
점심으로 얻어먹은 고기는 맛있었지만, 오후에 겪을 개고생을 생각하니 소화가 안 될 지경이었다.
두 번째 포인트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카메라 설치 위치가 너무 높았다. 가져온 작은 사다리로는 어림도 없었다. "부장님, 큰 사다리 좀 주세요." "큰 사다리 없는데."
"......"
그럼 저 높은 곳에 카메라는 날아서 답니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한숨을 쉬었다. 부장님은 어디서 빌려오겠다며 사라졌지만, 그 사이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10분이면 끝날 일을 1시간 동안 붙잡고 늘어졌다.
날씨는 또 어찌나 덥던지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타지에서 온 싱싱한 피 냄새를 맡은 울산 모기들은 나와 박 차장님만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우리는 가려운 몸을 긁어가며,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부들거리는 팔다리를 부여잡고 일했다. 이건 기술직이 아니었다. 그냥 '노가다'였다.
설상가상으로 급한 일정 탓에 다음 날 오후에 복귀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야근합시다! 내일 오전까지 끝내려면 방법이 없어요." 박 차장님의 단호한 선언에 모두의 눈이 동그라졌다. 결국 밤 10시가 다 되도록 땀과 모기와의 사투를 벌인 끝에야 겨우 큰 불을 껐다.
"고생했으니 고기 먹으러 갑시다!" 이 과장이 법인카드를 꺼내 들었다. 우리는 보상심리가 발동해 4명이서 12인분을 게 눈 감추듯 해치웠고,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시체처럼 뻗어버렸다.
기술자, 엔지니어, 혹은 현장 작업자들은 안다. 적합한 장비(공구)가 있고 없고 가 일의 속도와 퀄리티, 그리고 내 몸의 컨디션을 좌우한다는 것을.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흔히 말하는 <장비빨>은 실존한다. 비단 기술직뿐만 아니라 스포츠, 예술 등 모든 분야가 그러하리라.
뻐근한 온몸을 부여잡고 잠을 청하며 뼈저리게 되새겼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기술자는 공구를 가려야 한다. 아니, 가려야만 산다.'
역시, 모든 일은 장비빨이다. 제발 시작 전에 준비 좀 철저히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