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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직장인 수면 부족 백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시간

by 기록습관쟁이

어제 하루를 돌이켜보면, 시쳇말로 로그아웃 버튼이 빠진 컴퓨터처럼 정신없이 돌아가다가 정작 내 시간이라는 귀한 데이터는 쥐도 새도 모르게 휘발되어 버린 느낌이다. 마치 블랙홀처럼, 나의 에너지는 빨려 들어가고 남은 건 텅 빈 시곗바늘뿐이다. 혹시 당신도 나와 같은 궤적을 그리며 살고 있다면, 이 짧은 소멸의 기록이 부디 유쾌한 공감과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을 선사하기를 바란다.


부산의 화요일 저녁 6시와 블랙홀 드라이브

사건의 시작은 퇴근길이었다. 퇴근 시간, 도시는 거대한 유기체처럼 기지개를 켜며 숨을 내뱉고, 그 숨결은 곧 차량의 행렬이 되어 도로 위를 가득 메운다. 특히나 나는 본가에 잠시 들러 효도 인증샷이라도 찍어야 하는 임무를 안고 있었기에, 그 시간의 압박은 더욱 컸다.

퇴근하는 차량들이 만들어낸 장벽은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괴테의 가르침을 비웃기라도 한 듯, 나를 거북이와 달팽이의 중간쯤 되는 속도로 끌고 갔다. 내비게이션은 시뻘건 경고등을 띄우며 "예상 도착 시간, 9시 10분"을 냉정하게 통보했다. '아니, 이러다 아들 얼굴도 못 보고 재워야 하는 거 아냐?'라는 초조함이 엑셀 페달을 밟는 내 발에 힘을 줬지만, 세상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본가에 들러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그 짧은 여정마저도,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아가는 듯이 느껴졌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시간은 정확히 밤 9시 15분. 이미 온 집안에 육아 퇴근의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가장의 늦은 저녁, 홀로 남은 왕좌

"아빠 왔어!"

오늘의 숙제를 마친 용감한 아들은 이미 꿈나라로 떠나기 직전이었다. 가벼운 포옹과 '잘 자'라는 마법의 주문만 남긴 채, 나는 거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21주 차에 접어든 아내는 이제 혼자가 아닌 두 사람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기에, 수면 시간이 늘어났다. '괜찮아, 여보. 당신은 빨리 쉬어야 해.'라는 숭고한 가장의 마음으로, 아내와 나는 늦은 저녁 식사를 서둘러 마쳤다. 아내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지금부터 이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다!

하지만 그 나만의 시간의 왕좌는 텅 비어 있었다. 남은 식사를 마저 처리하며, 나는 이 시대의 가장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성지, 유튜브에 접속했다. 요즘 내가 유일하게 마음 놓고 보는 예능은 바로 '불꽃야구'. 현실에서는 불꽃같은 야근에 시달렸지만, 화면 속에서는 시원한 홈런과 땀내 나는 열정만이 가득했다. 맥주 한 캔 대신, 미지근해진 보리차를 마시며, 나는 잃어버린 에너지를 스크린 속에서 충전하려 애썼다.


40만 원짜리 '휴젠트'와 가장의 고뇌, 구글링의 늪

접시를 정리하고 설거지를 마치니 시계는 이미 10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오늘 밤도 늦었네. 이래서 아침에 늘 피곤하지.'라는 만성적인 피로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런데 그때, 아내의 나지막한 한 마디가 뇌리에 스쳤다.

"여보, 요즘 같은 날씨에 화장실 너무 추운데, '휴젠트' 하나 설치하면 어떨까? 그거 온풍도 나오고 건조도 된다던데."

'휴젠트'. 생소한 이름이지만, 아내의 편안함을 위해서는 당장이라도 찾아봐야 하는 필수 아이템으로 등극했다. 피곤함은 잠시 접어두고 스마트폰을 켰다.

휴젠트를 검색했다. 가격은 대략 40만 원. 설치비까지 하면 50만 원이겠지?라는 계산이 머리를 스쳤다. 50만 원이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내가 아니다. 가족의 행복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나는 가성비라는 가장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기 위해 결심했다.

'그래, 설치는 내가 셀프로 한다!'

이것이 바로 가장이라는 이름의 대단한 착각이자, 무모한 도전의 시작이었다.

화장실 환풍구 배선은 어떻게 따야 하는가? 설치 위치는 환풍기 옆이 좋은가, 샤워 부스 쪽이 좋은가? 천장에 구멍을 뚫을 때, 배선을 건드리면 어쩌지? 나는 전기 기술자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다시 건축가로 빙의했다.

평소에는 일단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최고!라고 외치던 내가, 갑자기 셀프 시공의 장인으로 변신해서 구글링의 심해로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요즘 날씨가 부쩍 추워져서 보일러실에 뚫린 환기 구멍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이거 찬 바람 들어오는데 막아도 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휴젠트 설치 검색은 잠시 멈추고, 나는 다시 '보일러실 환기구멍 폐쇄 위험성'을 검색하는 굴레에 갇히고 말았다. 관련 법규, 가스 중독의 위험성, 결로 문제 등, 세상의 모든 지식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은 나를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의 늪으로 끌여들였다. 10분만 검색하고 자려던 계획은 온 데 간 데 없고, 시간은 빠르게 11시 30분을 넘어섰다.


쐐기 한 판만! 의 유혹, 잃어버린 자정

'아, 이제 진짜 자자. 내일 아침에 눈 뜨는 게 무섭다.'

결심을 하고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순간, 뇌 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야, 이대로 자면 오늘 하루는 그냥 날린 거나 마찬가지잖아?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야지. 쐐기 한 판만 하고 자!'

이것이 바로 게이머의 마지막 발악이자, 잠은 죽어서 자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이들의 유혹이다. 나는 이성을 잃고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접속해 나의 캐릭터인 사제로 쐐기 던전 한판을 돌았다.

쐐기 던전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온 신경을 집중에 힐을 하고, 적을 처치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파티원들과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침대에 누운 시간은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후였다.

침대 천장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아... 잃어버린 나의 시간이여! 나는 결국 휴젠트와 보일러 구멍과 와우 쐐기에게 내 소중한 수면 시간을 헌납하고 말았구나.'

어제의 나는 피로와 책임감과 소확행이라는 세 가지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내일을 위한 에너지를 제로로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괜찮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아마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퇴근길의 고난, 가족을 위한 고민, 그리고 마지막에 붙잡는 나만의 유치한 소확행.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가장, 모든 현대인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 아니겠는가.

오늘만은 다짐한다. '내일은 반드시 계획을 잘 세워야겠다!'

물론, 이 다짐이 내일 밤 11시 59분에 또다시 잃어버린 자정에게 패배할 확률이 99%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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