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차장의 13년 전투 일지
박 차장, 이름 석 자보다 차장님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이 남자는, 기술을 밥벌이로 삼은 지 어언 13년, 그것도 대한민국 중소기업이라는 격전지에서 잔뼈가 굵었다. 전전긍긍, 이 네 글자가 그의 지난 세월을 가장 정확하게 요약하는 단어였다. 13년간 수많은 중소기업을 전전하며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면, 모든 중소기업은 '영원한 과도기'속에 머무르려 발버둥 친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피땀 흘리지만, 늘 제자리걸음. 박 차장은 맥주 한 캔을 따며 그 이유를 곰곰이 곱씹어본다.
제1장. 전쟁터의 지휘봉과 멈춰버린 뇌
중소기업의 전쟁터는 늘 특이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가장 먼저, 기업의 '대표 장수'가 늘 최전선에 선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직원 병사'들이다. 이 구조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대표 장수는 취임 첫날부터 병사들의 뇌리에 상명하복이라는 문신을 새긴다. 군기가 빠지면 전쟁에서 지는 법이니까. 처음에는 장수의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따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병사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는다. 뇌는 멈춘다. 그저 장수 명령을 기다리는 고성능 리모컨이 되는 것이다. 시키는 일에 120%의 효율을 내는, 생각 없는 기계. 그게 안전하고, 책임 소재도 명확하니까.
일이 술술 풀리고 전투에서 승리할 때(납품 완료, 계약 성공)는 아무 문제없다. 장수는 승리의 공을 독점하고, 병사들은 승리의 달콤한 휴가를 잠시 만끽한다.
제2장.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문제는 전선이 꼬이거나, 계획에 없던 복병(납기 지연, 품질 클레임)을 만났을 때 발생한다. 이때 대표 장수의 태도는 180도 돌변한다.
"자네들! 내가 시키는 것만 하는 기계인가? 지금 같은 위기에는 자발적인 사고를 해야지! 이 일은 왜 이렇게 꼬였나! 도대체 너희 뇌는 뭐 하러 달고 다니는가!"
갑작스러운 질타와 동시에 자발적 사고 강요. 병사들은 일시적인 인지 부조화와 이중 구속 상태에 빠진다. '어제까지는 명령만 따르랬는데, 오늘은 왜 나에게 주도적인 해결 능력을 요구하는가?' 혼돈 속에서 병사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생존을 위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 발버둥 치기 시작한다. 드디어 멈춰 있던 뇌가 오랜만에 경적을 울리며 시동을 건다.
제3장. 주도적 사고의 말로와 현장대리인의 비애
그러나 이 주도적 사고의 시간은 짧고 비극적이다. 잠시나마 능동적으로 움직였던 병사가 땀 흘려 결과물을 들고 장수 앞에 나타나면, 십중팔구 이어지는 것은 또 다른 질타이기 때문이다.
"이봐, 박 차장. 자네가 스스로 생각했다니 칭찬은 하겠는데. 내가 원하는 결과물은 이게 아니잖아!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왜 자재비를 10만 원 더 줄이지 못했지? 이 각도는 왜 75도가 아닌 80도인가!"
어차피 장수가 원하는 정답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잠시나마 의욕을 냈던 직원 병사의 뇌는 다시 전원을 내린다. '아,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게 낫겠군.' 그들 머릿속엔 다시 상명하복의 문신이 선명해진다. 그렇게 회사는 영원히 1인 지배 체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박 차장의 지난 13년 동안 가장 굵직했던 프로젝트 중 하나는 제법 규모가 있는 공사 프로젝트였다. 계약 직후, 그는 현장대리인이라는 막중한 책임까지 맡았다. 말 그대로 공사 완료까지 현장 모든 것을 책임지고 관리해야 하는 역할 위임이었다. 박 차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신경 쓰며 철야를 불사했다.
그런데 대표 장수는 시도 때도 없이 현장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박 차장, 그 자재는 왜 A사 제품을 썼나! B사 제품이 3,000원이 더 싼데! 3,000원은 돈 아닌가!"
"어이, 공기(공사기한)를 2주는 더 앞당겨야지! 경쟁업체보다 빨라야 우리가 이기는 거야!"
"지금 이 공법은 내가 3년 전에 쓰던 구닥다리 방식일세!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낫겠구먼!"
이미 박 차장은 현장 상황과 자재 수급, 안전 문제까지 고려해 최적의 판단을 내린 뒤였다. 하지만 장수의 명령은 늘 경제성과 장수의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두 가지 칼날로 포장되어 날아왔다.
박 차장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이럴 거면 차라리 대표 장수 본인이 현장대리인을 하시지, 왜 나에게 역할 위임을 했나?' 현장대리인이라는 책임만 주고, 권한은 장수가 독점하는 이 기형적인 구조. 병사는 위임받은 역할 때문에 책임은 져야 하는데, 정작 일은 장수가 다 해버리는 기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제4장. 진정한 장수의 역할과 박 차장의 통찰
박 차장이 보기에, 이 전쟁의 승리 확률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표 장수가 최전선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대표 장수는 병사들보다 더 나은 전략을 짜고, 보급품을 확보하며, 사기를 도모하는 최후방의 지휘환이어야 한다."
박 차장은 확신한다. 병사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그 결과에서 승리도 패배도 모두 맛보며 한 걸음씩 성장해야 회사가 크는 것이다. 패배의 쓰라림을 통해 다음에는 더 나은 판단을 내리도록 돕는 것이 장수의 역할이다. 그런데 왜 도리어 장수는 그것을 가로막는가? 회사의 성장은 곧 직원의 성장에 달려 있음을 왜 모르는가!
"급한 성미에 항상 일을 그르치는 건 결국 대표 장수다."
이것이 13년 전투 일지에서 얻은 박 차장의 최종 결론이었다.
제5장. 나의 팔자와 새로운 전투의 시작
"신기하게도 나는 왜 그런 장수 스타일만 만나게 되는 걸까. 내 팔자인가 보다."
박 차장은 씁쓸하게 웃는다. 어쩌면 그게 박 차장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이상 남을 탓하거나, 흉보고 욕하며 에너지를 낭비할 때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런 감정 소모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전혀 없었다.
"회사를 위하기 이전에, 내가 내 스스로를 성장시키자."
결국, 이 굴레를 끊을 수 있는 건 외부의 변화가 아닌, 오직 나의 레벨업뿐이다. 내가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실력과 안목을 갖춘다면, 더 이상 이런 1인 지배형 중소기업에 머무르지 않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나의 그릇에 맞는, 병사의 성장을 기꺼이 지켜봐 줄 줄 아는 더 좋은 대표 장수를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 차장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의 13년 병사 직원 역사는 이제 새로운 방향을 향해 재시동을 걸 참이었다. 이번 목표는, 더 이상 장수의 명령이 아닌 나의 성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