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직으로 왔는데 관람 인력이 되어버렸다
"어우, 가만 좀 있으세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오늘도 들었다. 저 마법의 주문. 직장 생활의 일시 정지 버튼이 있다면 바로 저 멘트가 아닐까. 상급자의 입에서 저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내 머릿속의 열정 회로도, 방금 막 떠오른 기가 막힌 아이디어도 강제 종료된다. 삑- 퓨즈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 의견은 아주 스무스하게, 마치 잘 발린 크림치즈처럼 묵살된다. 더 나은 방법을 구상하고 제안하는 나를 보며 그는 마치 '제발 긁어 부스럼 좀 만들지 마라'는 눈빛을 쏘아댄다.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적어도 현재 이 기가 막힌 상황에서는 말이다. 40대의 내가 수동적인 월급 루팡 모드에서 능동적인 오지랖퍼로 변모하며 겪는 성장통... 아니, 그냥 통증이다.
아. 내 소개가 늦었다. 나는 40대, 어디 가서 "라테는 말이야" 좀 섞어도 될 법한 나이의 경력직이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내 위치는? 신입도 아니고, 인턴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리자도 아닌... 그래, 굳이 정의하자면 '고연봉 보조 인력'쯤 되겠다. 원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솔선수범! 직접 두 팔 걷어붙이고 "자, 나를 따르라!" 하며 깃발을 흔들어야 할, 지금 처한 나의 입장.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먼발치에서 전장을 바라보는 관찰 예능의 패널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다. 100% 타의. 도대체 내 인생 시나리오 작가는 왜 갑자기 장르를 오피스 드라마에서 블랙 코미디로 바꾼 걸까?
대표이사의 빅 픽처와 부서의 동공 지진
시계를 2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나는 현장을 관리 감독할 장수로 스카우트되었다(라고 믿었다). 대표이사는 나를 앉혀두고 "자네의 그 화려한 경력이 우리 회사에 새 바람을 일으킬 걸세!"라며 호언장담했다. 연봉도, 직급도 그에 걸맞게 책정되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내 40대는 이곳에서 화려하게 꽃 피우리라!'
하지만 첫 출근 날, 부서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드라마의 장르가 스릴러라는 것을.
"아니... 신입 사원 뽑은 거 아니었어?"
"저... 저분이 신입...?"
부서원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은 갓 대학을 졸업한, 말 잘 듣고 빠릿빠릿한 20대 신입을 기대했던 모양이다(실제로 이전 근무자가 20대 신입 사원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며 3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퇴사했단다). 그런데 웬걸, 산전수전 다 겪은 눈빛의 40대 아저씨가 서류 가방을 들고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의 동공 지진은 진도 7.0 수준이었다. 나는 보았다. 제법 나이 든 사원을 보고 당황하다 못해 공포에 질린 그들의 눈빛을.
물은 벌써 엎질러졌다. 나는 출근을 무를 순 없었다. 이미 계약서에 도장 찍었고, 전 직장에선 송별회까지 거하게 치렀다. '에라, 모르겠다. 밑져봐야 본전 아니겠냐. 들이대 보자! 아저씨의 뻔뻔함을 보여주마!' 당시 나의 마음가짐은 비장했다. 흡사 적진에 홀로 떨어진 라이언 일병처럼.
잠복근무 1년 차
1년 차엔 그야말로 은신술을 연마했다. 모든 걸 받아들이고 수긍했다.
"박 차장님, 이건 원래 이렇게 하는 겁니다."
"아, 네. 그렇군요. (속마음: 그거 아닌데...)"
"저희 부서는 전통적으로..."
"아, 네. 훌륭한 전통이네요. (속마음: 조선시대냐?)"
내 개인적인 생각이나 의견을 나노 단위로 쪼개어 최소한으로만 표출했다. 나는 경력직이지만 신입의 자세로, 아니 거의 도를 닦는 수도승의 자세로 업무 분위기에 적응하려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튀지 말자. 둥글게 살자.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지 않나. 금융 치료가 최고다.
그렇게 나는 부서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사이에 낀 작은 모래알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납작 엎드려 윤활유가 되기를 자처했다. 퇴근길,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잘하고 있어. 이게 바로 처세술이야. 40대의 연륜이란 바로 이런 인내심이지."
각성 2년 차
2년 차엔 좀 바뀔 줄 알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죽은 듯이 지냈는데, 이제 슬슬 "어이구, 우리 박 차장님, 이제 본색을 드러내시죠!" 하며 멍석을 깔아줄 줄 알았다. 하지만 만 2년을 꽉 채운 지금, 바뀐 점은? 전혀 없다.
변한 게 있다면 딱 하나. 좀 더 솔직하고 대담해진 내 성격뿐이다. 1년 차의 그 조신했던 박 차장은 이제 없다. 속에서 천불이 나기 시작했다. 조금씩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가슴속에 사직서 대신 '사이다 발언'을 품고 다니기 시작했다.
상급자가 "가만 좀 있으세요"라고 하면, 예전엔 "네..." 했지만, 이제는 속으로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보이냐!'라고 외친다. 물론 입 밖으로 내뱉진 못한다. 아직은 소심한 40대 가장이니까.
같은 부서 직원들은 각자의 역할을 너무나도 잘 수행해 냈다. 그들은 마치 잘 짜인 아이돌 그룹의 칼군무 같았다. 센터, 메인 보컬, 래퍼... 자기들끼리 눈빛만 봐도 척척 돌아간다. 나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아니,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들은 이미 빈틈없이 스크럼을 짜고 나를 방어하고 있었다.
"박 차장님은 그냥... 거시적으로 봐주세요. 하하."
거시적? 내가 무슨 경제 연구소장이냐? 디테일은 자기들이 다 챙기고, 나에겐 구름 잡는 소리만 하란다. 이미 빈틈없이 막아준 그들 모습에 나는 점점 지쳐갔다. 그들의 팀워크는 나를 배제함으로써 완성되는 듯했다.
클라이맥스: 굴러온 돌의 딜레마
이제 상황은 명확해졌다. 대표이사는 나를 메기로 투입했지만, 이 연못의 물고기들은 메기가 오자마자 "어? 쟤 왕따 시키자"라며 똘똘 뭉쳐버린 것이다. 나는 메기가 아니라, 그냥 물 위에 둥둥 뜬 기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나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묻는다. "너, 여기서 뭐 하냐?" 경력은 녹슬어가고, 뱃살은 늘어간다. 편하다면 편한 생활이다. 적당이 눈치 보며 월급 루팡 짓을 해도 아무도 뭐라 안 한다. 아니, 오히려 그걸 원한다. 하지만 내 안의 '일잘러' DNA가 비명을 지른다.
"이건 아니잖아! 나도 일하고 싶다고! 나도 성취감이라는 마약을 다시 맛보고 싶다고!"
40대. 더 이상 실패를 경험 삼아 웃어넘길 수 없는 나이. 하지만 아직 은퇴를 논하기엔 너무나 팔팔한 나이. 수동적인 회사원 A에서 개척자 B로 변태 하려는 찰나, 나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 앞에 서 있다.
상급자의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는 말은 이제 나에게 도전장처럼 들린다. '그래? 네가 얼마나 잘 알아서 하는지 보자.'라는 삐딱한 마음과, '아이고, 저거 저러다 터질 텐데... 내가 도와줘야 하는데...'라는 오지랖 넓은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널뛰기를 한다.
결말
오늘도 나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업무 일지 대신 이 울분 섞인 글을 쓴다. 글을 쓰다 보니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그래, 상황이 코미디라면 내가 최고의 코미디언이 되어주마.
그들의 견고한 벽. 그 틈새 업는 방어막. 2년 동안 지켜봤으면 이제 파악은 끝났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선택뿐이다.
그들의 틈새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 "나도 좀 끼워줘!"라고 질척거릴 것인가? 아니면, "다 비켜! 내가 판을 새로 짠다!"라며 책상을 엎을 것인가? 그도 아니면, 이 월급 루팡의 삶을 즐기며 회사 몰래 웹소설 작가로 데뷔할 것인가? (이게 제일 가능성 있어 보인다.)
창밖을 본다. 꽉 막힌 도로가 내 마음 같다. 하지만 언젠가는 뚫린다. 내 40대의 커리어도 지금은 정체 구간이지만, 곧 액셀을 밟을 날이 올 것이다. 그게 이 회사 안이든, 밖이든 말이다.
나는 모니터 속 껌벅이는 커서를 보며 마지막 문장을 적어 넣는다.
"빈틈없는 그들의 벽을 무너뜨릴 것인가, 아니면 이 벽 밖에서 나만의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40대의 능동적인 나는 이제 역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 역할을 스스로 다시 써야 하는 나이다."
자, 이제 퇴근이나 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아니 내일의 눈치 게임이 뜰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