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그 회사 때려치워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지갑이 나를 샀다

by 기록습관쟁이

출장지의 밤은 늘 서늘하다. 숙소의 낡은 에어컨이 내뱉는 기계적인 소음만이 방 안을 채운다. 마흔넷, 누군가는 인생 황금기라 말하지만, ICT 엔지니어로 살아가는 내게 이 시기는 로그기록과 마감 기한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외줄 타기와 같다.


모니터의 파란 불빛에 눈이 침침해질 때쯤, 습관적으로 달력을 본다. 37주. 아내의 배는 이제 남산만 해졌을 것이다. 첫째 성한이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다. 곧 태어날 딸아이를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지다가도, 가장으로서 짊어진 어깨의 무게에 이내 숨이 턱 막히곤 한다.


"삐리릭-"

휴대폰이 몸부림친다. 아내다.


"오빠, 언제 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다. 숨소리조차 무겁다. 37주 만삭의 몸으로 혼자 아이를 돌보며 집안일을 해내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잘 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늘 차갑고 건조하다.


"주말쯤 가야 할 것 같아. 일이 좀 많네."

"왜 이렇게 오래 있다 와...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는데."


짧은 침묵 사이로 미안함과 고단함이 뒤섞여 흐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미안해"라는 힘없는 말뿐이다. 사실 나도 달려가고 싶다. 부산 집으로, 내 아내가 차려주는 따뜻한 집밥이 있는 그곳으로. 하지만 눈앞 시스템은 자꾸만 오류를 뱉어내고, 나는 이 오류를 잡아내야만 가족의 내일을 담보할 수 있다.


그때였다. 전화기 너머에서 벼락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열한 살 아들, 성한이였다.

"아빠! 그 회사 그냥 때려치워요!"


아내의 헛웃음 섞인 코웃음 소리가 들린다. 녀석의 당돌한 제안에 기가 찬 모양이다.

"성한아, 아빠가 회사 그만두면 우리 가족은 누가 먹여 살려? 밥은 누가 사주고, 네 장난감은 누가 사줘?"


아내의 현실적인 핀잔은 나를 향한 투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 역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기 너머로 다다다 발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진 성한이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단호하고 씩씩했다.


"내가! 나 돈 있어! 이거 봐요!"


아내는 웃음이 터진 듯했다. 성한이가 제 방에 달려가 돼지저금통을 털어온 건지, 아니면 세뱃돈을 모아둔 낡은 지갑을 들고 온 건지 눈에 선했다.


"오빠, 얘 좀 봐. 지갑 들고 와서 아빠 먹여 살리겠대. 자기가 돈 많다고 큰소리치네."

그 순간, 출장지의 차가운 공기가 일순간에 멈춘 듯했다. 성한이의 지갑 속에 든 돈이 얼마일지 나는 안다. 기껏해야 몇만 원, 혹은 천 원짜리 몇 장이 전부일 그 작은 지갑. 하지만 그 꼬깃꼬깃한 돈은 20년 넘게 엔지니어로 구르며 받아온 그 어떤 성과급보다도 묵직하게 내 심장을 때렸다.


아들은 아빠가 벌어오는 월급보다 아빠와 함께하는 저녁이 더 고팠던 거다.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내놓아서라도 아빠를 집으로 데려오고 싶었던 그 마음. 아이 눈에 비친 아빠는 돈을 벌어오는 기계가 아니라, 보고 싶고 함께 놀고 싶은 세상 유일한 영웅이었다.


출장지 밤하늘은 여전히 어둡지만, 마음속엔 환한 등불 하나가 켜진 기분이다. 감동의 쓰나미가 밀려온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걸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목이 메어왔다.


나는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다. 아까와는 마음가짐이 다르다. 지금 내가 치는 이 코드 한 줄 한 줄은 단순히 시스템을 고치는 작업이 아니다. 내 아들의 소중한 지갑을 지켜주고, 곧 태어날 딸아이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며, 고생하는 아내에게 건넬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사기 위한 정당한 노동이다.


아들, 고맙다. 네 지갑 덕분에 아빠는 오늘 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어.

이번 주말엔 아빠가 그 '전 재산'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들고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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