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졸한 노인

불안 없는 불안

by 이원우

노인은 한가해 지자 아주 오랜만에 집안을 둘러봤다.


언젠가 실수로 화재가 났을 때 바로 알려줄 천정의 화재감지기는

너무 오랫동안 작동할 기회가 없어 고장 나 있었다.


혹시 집안에 침입할지도 모를 짐승이나 강도를 대비해 숨겨둔 권총은

너무 오랫동안 사용할 기회가 없어 녹슬어 있었다.


이것만은 필요하다고 생각해 어려울 때도 해지하지 않고 유지해 왔던 질병보험은

너무 오랫동안 건강해서 사용할 기회가 없이 만기가 되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르는 논리적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갈고 닦아온 비수 같은 그 독설들.


그러나 세상엔 의외로 좋은 사람들만 있다 보니 그 애써 준비한 말들은 아깝게도 어느새 인가 잊어버리고 말았다.


오래전 만든 철재 울타리는 녹슬어 모양과 기능을 잃었고

날카롭게 빛나던 대리석은 부드러운 이끼로 감싸여 각을 잃었으며


미처 치우지 못했던 벌레와 새의 시체는 스스로 해체되어 식물들의 영양분이 되었고

정원 한 구석에는 심지도 않았던 멋진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너그러운 자연은 응집을 부식시키고 분해하여 다정하게 골고루 초기화시켰다.


우리들이 말하는 용서와 화해. 그 얼마나 옹졸한 자만인가.


- - -


https://youtu.be/h4q8MPRo1jw

keyword
작가의 이전글AI가 읽어주는 단편소설-49세의 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