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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동 Feb 13. 2020

한없이 가여워, 끝없이 경이로운

#그리스 여행 - 아크로폴리스

*PC버전에 맞게 정렬되었습니다.



지난 여름. 60여일의 유럽 5개국 여행을 다녀왔다.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그리스. 내게 이 여행은 반드시 그리스에서 시작되어야만 했다. 아버지들의 아버지, 조상 중의 조상과도 같은 아테네에서 첫 발을 디뎌 이탈리아 - 네덜란드 - 영국을 거치며 역사의 주요한 지점을 그대로 따라와 현대 유럽까지 닿는 것이 나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자정을 넘긴 시각, 아테네에 도착하여 아크로폴리스에 오르기까지 꼬박 하루하고도 절반이 걸렸다. 전날엔 가볍게 시내와 고고학박물관을 구경하고, 3일째에 아크로폴리스 패스를 통해 주요 유적을 돌아다니려고 했다.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제우스 신전 인근을 먼저 들렀다가 점심을 먹고 아테네의 심장으로 향했다.






아테네에 가서 도시 중심부로 가끔 고개를 들어보이면, 건물 사이사이로 높이 솟은 언덕 정상을 볼 수 있다. 그 위에 솟은 신전을 보노라면, 올림포스 신들의 옷자락이 휘날리는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아크로폴리스는 신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보다 낮은 언덕인 아레오스파고스와 아고라는 인간의 세계다.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은 다른 곳들보다 훨씬 험난할 수밖에 없다. '언덕'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뤄진 바위산이라는 표현이 맞다. 갈수록 가팔라지는 길을 거치다보면 디오니소스 극장과 더불어 헤로데스 아티쿠스를 비롯한 여러 유물들도 볼 수 있다. 수많은 연극의 무대였던 극장과, 오늘날까지도 노래가 울려퍼지는 헤로데스 아티쿠스를 지나가면 무릎에 무거움이 점점 더해지고 목이 말라온다. 그때쯤, 드디어 신의 세계의 관문인 프로필리아를 마주한다.





프로필리아를 넘어서면 보이는 것은 파르테논 신전이다. 원래는 이곳저곳에 다른 축조물들이 있었으나 거의 터만 남은 상태다. 파르테논보다 조금 더 떨어진 아테나 여신상은 아예 소실되어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웅장한 파르테논 신전과 더불어 에렉테이온 신전을 천천히 둘러보고 난 후에, 나는 주위의 바윗돌 하나에 털썩 앉아 긴장된 다리를 풀었다. 다소 구름이 많았지만 여전히 햇빛이 그리스 국기에 부서지고, 이따금 구름이 걷히면 언덕 아래 붉은 지붕들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이때껏 적지 않은 도시를 다녔지만, 이처럼 깊은 곳의 수원과 같은 도시에 온 적은 없었다. 어쩌면 모든 이들이 앙망하는 또다른 화려한 도시들의 정신적인 고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절대적인, 허나 어쩐지 가냘픈 도시의 중심부에 선 적은 없었다.


어쩐지 가냘프다?


아테네는 화려함과는 사실 거리가 멀다. 솔직히 말하면 아크로폴리스도 그렇다. 그곳을 받치고 있는 절벽이, 그곳에 서있는 신전과 바윗돌이 그렇다는건 아니다. 그보단 이 '신의 세계'를 상상하고 끝내 자연의 재료로 세워낸 인간들이 가냘프다.





여정에 포함된 곳중 가장 멀면서도 신성하게만 느껴진 이곳에 앉아, 나는 잠시 아득히 오래된 시대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테네, 그리고 아크로폴리스. 조잡한 공사장비는 찾아볼 수 없고, 적잖은 복원의 흔적들도 없는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 절로 고갤 숙이게 만드는 그곳에 가지각색 키톤을 입은 이들이 신의 영광과 손결 아래 조용한 걸음을 옮긴다. 이따금 함께 온 다른 이들과 세계와 존재, 신과 인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지도 모른다. 아테네학당에 그려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조용히 신의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이모든걸 위해 광대한 절벽을 오르내리고 또 오르내린다. 절벽을 둘러싼 아테네 시민들의 잠자리 머리맡엔 갖가지 생활에 대한 고민과 삶의 사연들이 맴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내일도 그곳을 오르내릴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맺혔다.



소매치기를 당한 것도 아니고 기차를 놓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여행 사흘차에 눈물이 났다. 나조차도 황당하였다. 이곳에서 울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어뵀다.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보다 깨달았다. 아테네 시민들, 그 인간들의 모습이 가여웠다. 몇천년 전 세상이지만, 그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도 역시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 속 고통이 있었다. 또 잔잔한 기름처럼 속으론 뜨거워도 그 티조차 내지않아 더더욱 답답하고 감정과 생각들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두려움이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제아무리 인간중심의 사상, 예술일지라도 결코 피해갈 수 없는 화두인 인간의 죽음.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그 운명만큼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이 있을까. 거대한 아크로폴리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 슬픔이 신전을 낳았다. 나의 힘으로는 통제 못할 세계가 있다는걸 알게 된 인간은, 북적이는 도시의 바위언덕 꼭대기에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파르테논을 짓게 됐다. 연약하고도 가냘펐기에, 인간은 이토록 경이로운 건축을, 예술을, 공간을 만들어냈다.








아크로폴리스에선 많은 것을 논할 수 있다. 언덕 아래 놓인 아테네를 바라보며 떠올릴 수 있는 주제는 셀 수 없이 많다. 자연, 신화, 정치, 종교는 물론이요 버젓이 펄럭이는 그리스 국기를 보고 있자면 멀지 않은 시기의 역사도, 바로 오늘의 현상들도 얼마든지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리스 사를 읽고, 공간에 대한 자료들을 미리 읽어왔다. 추천받은 예능프로그램도 미리 보고 왔으니 더하면 더했지 모자란 준비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걸 뒤로하고 가장 강렬하게 느낀 것은 하나였다.



인간은 한없이 가엾기에, 그토록 끝없이 경이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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