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내 여행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도시들의 얼굴'을 마주한 경험이다. 운이 좋게도 난 여태껏 정말 다양한 도시와 만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감정의 냉탕과 온탕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열탕도 물론 있었고.
그리고, 애매한 도시들이 있다.
생각보단 괜찮은데 기대만큼 좋진 않은 그런 곳들. 아니면 좋은 것을 충분히 빨아들일 시간이 부족했던 곳들, 나쁜걸 볼만큼 오래 있지 않은 곳들(사실 나쁜 곳은 단박에 알아본다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그들은 대부분 대도시에서 대도시로 옮겨갈 때 거치는 장소이다. 그래서 실망에 오래 빠져있을 여유도 없지만, 분명히 지나가기로 마음 먹었던 곳인지라 기대했단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가슴 한켠에 작은 돌처럼 조그만 불편함을 남기는 곳이다.
말은 이렇게 했는데 사실 이런 도시들이 잘 안떠오른다. 없으니까. 도시의 얼굴은 여행이 끝날 때쯤에야 보인다. 그럼 그때까진? 사실 좋고 싫음, 그리고 애매한 불편함 사이의 진동일 뿐.
오늘 이 말은 나에게 보내는 위안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파리에 가고 싶었는지, 또 상해와 뉴욕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진정 원하는 그림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걸까'? 묻기를 수백번. 언제까지 줄을 서고 무언가를 타고 간헐적인 편두통에 시달려야 하며 때때로 외로운 거죽을 덮어쓰고 울어야 하는 것일까? 꿈에서 눈물을 흘리며 맨해튼을 지나갔다. 사실 맨해튼 자체는 보스턴 보다도 별로인 구석이 많은데도 그곳은 내 마음을 편하게 기쁘게 만든다.
왜 운명과 감동의 얼굴로 기억되는 그 도시들을 끝끝내 추구하게 되는 걸까. 그곳에서 보낸 저 애매한 시간들 불편한 감정들이 있는데. 그렇다. 분명 안 좋은 시간들이 있었다. 별로인 구석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좋은 여행의, 별로인 시간일 뿐이다.
그닥 길지 않게, 잠시 마뜩잖을 순간일 뿐이라고...
우선 그걸 인정한 다음에야, 용기를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