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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동 May 19. 2020

오래된 편지들을 읽다가

난 만약을 위해 내 방의 재난 매뉴얼을 정해두었다. 비상 상황 시에 들고 달아날 물건이 총 네 상자에 보관되어 있다. (그걸 실제로 다 들고 갈 수 있는지는 따지지 않았다) 한가지 공통점. 모든 상자는 '추억'과 관련되어 있다.


오늘은 그중 하나를 열어보았다. 침대 끝에 두고 먼지 끼도록 거의 살펴보지 않는 상자였는데, 쌓이다못해 들러붙은 먼지들을 왠지 떼주고 싶었다.


상자 맨 위에는 중3때 선물받은 '전체 교사 시간표'가 있다. 학교 선생님을 좋아했던 나에게 친구들이 학기말 교무실 대청소를 할 때 가져와 준 것으로 지금껏 가장 황당한 선물이었다. 코팅 먹인 이 사절지 아래엔 가지각색의 플라스틱 파일에 담긴 가정통신문, 그리고 이른바 수업 '프린트물'이 있다.

중2때부터 모은 것들로, 철저히 아름다운 기억을 가진 수업과 선생님의 자료물 위주로 보관을 해놓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땐 그나마 재밌게 들은 사회 시간 프린트물밖에 없다. 그럼에도 꽤 많아서 두께만큼은 거의 쌀가마니와 같다. 어릴적 듣던 말에 의하면 프린트물은 비료 혹은 분뇨(...)로 만들었다는데 그게 사실인줄은 모르겠다. 하여간 난 그 프린트물 냄새들을 참 좋아했다.


이렇게 학창시절 추억을 들춰보고나면, 보관물의 시간대가 약 15-20년전 쯤으로 점프한다. 중고교시절 유물들을 정리한걸로밖에 보이지 않던 상자의 진짜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 아래에는 '부모님'이 받은 편지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다. 그 상자는 사실상 부모님의 편지 보관함인 셈이다.(이것만 봐도 알 수 있다 - 나의 '보관병'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임을.)

그중엔 부모님이 서로 주고받은 것도 있고 다른 이들로부터 받은 것도 있다. 연하장, 크리스마스 카드 등 종류는 물론이요 수발신지도 다양하여 대학 기숙사와 군대 훈련소 주소까지 알 수 있다. 'PAR AVION'이라고 도장 찍힌 항공 편지도 있다. 그런데 (먼지 때문에 간간이 기침을 해주며) 구경을 하다가, 편지가 아닌 메모를 하나 보았다.


'오늘은 ㅇㅇ이가 태어난지 7, 8, 9 ... 열흘 째 되는 날이다.'


무려 25년 전의 이 메모를 읽자마자, 바닥에 펼쳐놓은 무수한 날짜들 사이에 한 획을 긋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 이 먼지 상자와 마주본 곳에는 또다른 상자가 있다. 비교적 작고 가볍다. 그리고 먼지가 없다. 그것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받은 '나의' 편지 보관함이다. 대부분 친구들이 준 것이며,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편지도 있다. 편의상 부모님 편지함을 1번, 내 편지함을 2번으로 부르겠다.


두 편지함 사이엔 독특한 간극이 있다. 이어져있지만, 떨어져있고 떨어져있으나 이어져있는. 인류사를 예수 탄생 이전이후로 크게 나누듯, 이 편지들은 나의 생일 이전이후로 나뉠 것이다. 내 생일이 없었다면 2번 편지함은 없었을 것이고, 1번 편지함이 없었다면 내 생일 자체가 없었으리라. 두 편지함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서로를 모를 가능성이 크다. 아니, 웬만한 2번 함의 주인공들은 1번 함의 시대에 대부분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들은 알까. 그들의 흔적이 지금 내 작은 방에 모여있다는걸. 서로가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같이 살았고, 바로 오늘 이순간에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들의 연결점이 된 것만 같다. 사실 모든 이들은 자기가 아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의 연결점일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경우 내가 가늠하지도 못할 정도의 시간이 그들 마음 속에서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산다는건 내 자신이 무언가를 잇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시간과 공간의 분절을 나는 잇고 있다. 내가 만든 연결은 나 혼자만 만들 수 있기에 참으로 특별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내 이야기'는 모두 특별하다.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연결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멀리 오고가기 힘들고, 많이 마주치고 헤어지기 어려운 지금 그 연결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부모님이 들은 음악과 내가 듣는 음악이 이어진다. 어릴 때 갔던 여행지와 작년에 다녀온 곳들이 이어진다. 어머니에게 중요했던 이들과 나에게 중요한 이들이 이어진다. '보이지 않는 끈'이란 길가의 꽃처럼 조용히 피어있는 듯 하다.


다음엔 또 무엇이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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