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말이 없었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사건을 겪으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순간이 온다.
”흐흐흐 무슨 소리야“
아직 내려가지 않은 입꼬리를 부여잡고 물었다.
”킄킄, 농담이야. 속았지?“
그다음 대사는 이랬어야 한다.
서둘러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컷! 다시 갈게요.”
실체도 없는 반전 드라마 감독이 소리쳤다.
그렇게 드라마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 얘 내 친구랑 꽤 오래 만난 여자 앤 데“
”아이, 자꾸 농담하지 말고 “
”아니, 진짜야. 나랑도 친해“
”아…그럼 최근에 헤어졌겠지“
”아닌데…그럼 내가 확인해볼게“
내 인생 드라마 작가와 감독은 밋밋한 전개를 용서할 수 없었을까.
”야. 아직 만나고 있다는데“
대본에 없던 애드립이 여기저기 난무하고
주인공은 멍하니 선 채 생각했다.
“아, 얘긴 들었던 거 같다. 정리 중인데 뭔가 확실하게 끝내기 어려워하더라고”
미세하게 떨려오는 안면 근육을 붙잡고 재빠르게 가짜 입봉작 대사를 써 내려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여주인공을 만나는 장면.
”ㅇㅇㅇ알아?“
”어? 너가 걜 어떻게 알아?”
“걔가 너 만난 지 2년 넘었다던데”
침묵. 상대방의 얼굴은 클로즈업되었다.
차라리 용서를 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장 깊은 곳에 꼭꼭 숨겨놨던 아량과 이해심, 포용력 따위의 구태의연한 감정쯤이야 연기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응..헤어지려던 중인데, 아직 못 헤어지겠대”
두 주인공의 상상력은 비슷했지만,
급조된 시나리오를 흡수해 내는 연기력만큼은 일품이었다.
“그래? 그럼 그 친구 좀 만나보자”
나는 그렇게 긴장의 강도를 높이며
대본 밖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