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 작가의 새 글을 읽었습니다. 니체의 개념 중 '영원회귀'에 대해 쓴 글이었습니다. 니체는 우리를 좌절하게 만드는 어려운 철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죠. 책 <살고 싶다는 농담>의 한 꼭지에서 다룬 니체의 '영원회귀'란 무엇일까요?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입니다. 즉 우리 삶이 동일한 형태로 영원히 반복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병장수의 행복이라든가, 내세를 기대하는 믿음 또는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윤회와는 다릅니다. 그저 완전히 동일한 삶이 무한 반복된다는 개념인데, 잘 생각해보면 무척 공포스러운 개념입니다. 삶이라는 짐을 지고 나가는 우리의 여정에, 끝이라는 안식이 없다는 것은 영겁의 형벌에 가깝습니다. 만약 그 삶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면, 허지웅 작가의 표현대로 토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의 삶은 지긋지긋합니다. 누구에게나 찬란한 순간은 있지만 대부분의 삶은 지긋지긋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삶을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필연적인 고단함을 담담히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인스타그램 속 화려한 삶의 모습들은 극히 작은 부분이거나 허상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에 흥미를 잃어가고 소중한 존재들과 이별을 하며 고독 속에 내던져지지만, 그 와중에도 먹고살기 위한 버거운 일상을 해결해나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여정의 어느 길목을 돌았을 때, 우리는 삶이란 '살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동의하게 되죠. 김훈 작가는 '밥벌이의 지겨움'이라고 표현했고 허지웅 작가는 '버티는 삶에 대하여'라고 썼습니다.
글을 읽다 몇 년 전 봤던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책을 덮고 다시 돌려보았는데, 바로 저스틴 벤슨 감독의 <타임루프>라는 영화입니다. 영원회귀가 가진 공포를 잘 담아낸 영화입니다. 반복되는 시공간에 갇힌다는 설정으로 충격적인 영상과 함께, 영겁이 주는 아득한 공포를 느낄 수 있습니다.
형제는 어릴 때 부모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들을 거두어 준 건 외딴 시골에 모여 사는 어느 공동체였습니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자급자족을 하는 그곳은 아늑해 보였으나, 형은 점차 사이비 종교집단 같은 광기를 알아채고 동생과 공동체를 빠져나옵니다. 언제나 그렇듯 동생은 형이 하는 데로 따랐습니다.
공동체 밖 사회로 나온 형제는 희망을 품고 닥치는 대로 일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10여 년을 고군분투하지만 일은 잘 풀리지 않았죠. 인스턴트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던 어느 날, 형제 앞에 비디오테이프가 도착합니다. 그 속엔 공동체의 동료들이 어디론가 떠날 것임을 예고하며 작별을 고하는 모습이 담겨있었습니다. 동생은 따뜻한 음식과 격려를 나누던 공동체가 그리워져 형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찾아가자고 부탁합니다.
형제가 10년 만에 찾아 간 공동체는 비밀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하늘 위 전능한 존재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죠. 그 존재는 이곳을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 속에 가두었습니다. 반복되는 시간의 간격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었고, 시간이 다하면 존재에게 죽임을 당하고 소생하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형제는 각기 다른 시간 속에 갇힌 사람들을 만나며 경악할 경험을 합니다.
전능한 존재에 의해 죽는 건 굉장히 고통스럽기에, 어떤 이들은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쪽을 택했습니다. 물론 소생하면 다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반복해야 했죠. 30분의 시간에 갇힌 사람은, 목숨을 끊을 시간조차 없는 3초의 시간에 갇힌 사람보다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비밀을 풀기 위해 마을을 떠돌던 형 저스틴은 우연히 이곳을 방문했다 갇혀버린, 크리스와 마이크라는 두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시간의 감옥에서 반드시 빠져나갈 배열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보고 있었습니다. 존재가 있을 하늘에 욕지거리를 날리고는, 새로운 배열을 찾기 위해 불속에 뛰어들기 전, 그들은 저스틴에게 말합니다.
"중요한 건 존재가 제 삶을 재개하기보다는 저 스스로 원해서 하는 거예요."
스스로 원해서 생을 끝냈지만 결국 죽음과 소생의 굴레에서 그들은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빠져나갈 배열을 찾기 위해 스스로 죽고 있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영화의 말미에 이 의지는 형제를 구해내는 열쇠로 작용합니다.
영화 속에서 마을은 영원한 반복에 갇힌 재앙의 공간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현실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새로운 즐거움으로 가득한 삶을 소진하다 보면, 우리는 반복의 굴레가 주는 부조리함을 느끼게 됩니다. 일상에서 우리를 찾아오는 소위, '현타'라고 할까요?
시지프스는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신화 속 인물입니다. 온 힘을 다해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린 바위는 다시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지기에, 그는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 속에 갇힙니다. 끝나지 않을 매일의 고단함과 시지프스의 형벌은 닮아 있습니다.
시지프스 신화를 통해 삶의 부조리에 대해 쓴 작가 알베르 까뮈는,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하는 건 부조리함을 직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부조리가 해결될 것을 기대하거나, 다음 생의 희망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삶은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반복되는 삶에 의지를 다해 부딪혀 내는 것이죠. 그것은 앞서 소개한 영화 <타임루프>에서 배열을 찾는 두 친구의 모습이고, 허지웅 작가가 말한 '버티는 삶'이기도 합니다. 니체는 영원 회귀하는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즉, 아모르파티 (amor fati)입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다를 바 없을 시공간에서, 우리는 삶의 변화를 줄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타인에게서, 인상된 연봉에서, 주식계좌의 수익률과 알코올 또는 영화와 책에서, 언젠가 휘발될 즐거움을 찾습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인생이 빠져나갈 수 없는 철창으로 느껴질 때, 좌절감과 허무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휘발될 즐거움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난한 여정을 버텨내 가며 사는 것 역시 인생이란 점을 인식하려 합니다. 그래서 삶은 반복의 연속이지만 의지를 다해 받아들이겠다고 주먹을 흔들어 보일 때, 마음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 공허함을 채우는 것은 바로, 인간이 부조리한 삶에 대항할 수 있는 '의지'라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끝나지 않을 형벌에 갇힌 시지프스는 어떻게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알베르 까뮈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지프스 신화>의 마지막 장을 끝맺습니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스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