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었다

by 표고

하나의 사건에 마음을 쏟는 시간과 노력이, 다른 사람보다 유독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사건이 마무리가 될 때까지 모든 상황을 가정해 보고, 그 하나하나의 상황들이 발생했을 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그리고 가정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선택에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있을지 등을 아주 꼼꼼하게 생각해 보는 거다. 그래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때가 아닌 거겠지, 하고 잠시 미뤄두긴 하지만 그래봐야 반나절. 삼시세끼 밥을 챙겨 먹듯 미뤄둔 일에 대해서도 자주 꺼내 보고 때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이 때다, 싶었을 때가 오는 거다. 이땐 이미 그 사건에 대한 생각은 질려버리기 직전, 아니면, 이미 진절머리가 난 후다. 그리고 후회도 없겠지.


이런 사람은 모든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 보여도 중요한 일은 절대 잊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결국 결론을 만들고, 누군가 고민 상담이라도 해온다면 굳이 경중을 말하지 않아도 중한 것만 쏙쏙 뽑아 기억한다.

이런 사람은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겠지만 이미 치열한 생각 끝의 결론이므로 내 짧은 설득은, 오래가지 못할 내 아쉬움은, 그저 내 몫일 뿐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낸 결론엔 신뢰가 있다. 가타부타 토를 달만 한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나에게 부정적인 얘기라도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쏟은 결론이므로 존중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들의 눈빛을 안다. 눈을 마주치면 곧 울 것 같은 마음도, 뛸 듯 기쁜 마음도 모두 다 들켜버리고 마는 그 웅숭깊은 눈빛을.







나는 어릴 때부터 숨기고, 웅크려 들 수밖에 없는 삶을 살 수도 있는 환경이었다.


“싫은 건 싫다, 좋은 건 좋다고
꼭 얘기해야 하는 거야.
싫은 건 하지 말고 좋은 것만 해”



다행히 이렇게 말해주는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나름대로 당당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싫은 건 하지 말고, 좋은 것만 해야 했기에 골똘히 고민했다. 도대체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진짜 좋은 걸 선택하는 건 부먹과 찍먹을 고르는 문제가 아니기에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모든 뒷감당과 책임도 내가 짊어져야 했기에 더 그랬다.

그리고 이렇게 좋아하고 행복하기 위한 선택만을 고민했던 나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싫어하는 것만 해야 하는 날들 때문에, 그리고 무엇이 행복한 선택인 줄 알면서도 고민조차 할 수 없는 절망감 때문에.


그러다가 웅숭깊은 눈빛을 가진 선배를 만난 것이다.

엄마가 내 행복을 응원해 주는 사람이라면, 이 선배를 만났을 땐 삶의 길잡이를 만난 것 같았다. 사회생활뿐 아니라 내 사생활 속에서도 이 선배의 조언이 꼭 필요한 날들이 많아졌다.

깊이 고민하고,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

꼭 저렇게 살면 될 것 같았고, 꼭 그런 사람을 만나면 될 것 같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같이 고민하다 보면 뭐든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 그 선배가 회사를 떠났다.

나의 이 복잡한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창구 같은 선배가 떠났다. 이제, 매일매일 아리송한 걸 물어볼 사람이 없어졌다.







어느 날 그 선배가 한 말이 생각난다.


“대충 살아야 돼.”



우스갯소리였다. 뱉어놓은 선배도 웃었고, 들은 나도 웃었다. 선배도 나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매사 흘러가는 대로 대충 사는 사람들이 편해 보이다가도 싫었다. 지금 당장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거나, 남에게 미루면 된다는 생각을 그대로 실현하며 사는 사람들. 그리고 이 싫어하는 걸 좋아하고 싶은 생각도 없으므로 나는 앞으로도 매사 치열하게 고민하고 힘들게 선택하며 살아갈 것이다. 조언을 구할 사람도 없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어쩌면 다시 한번 성장할 때가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금도 선배가 떠났구나, 생각하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하지만 눈물은 그저 아쉬움의 잔재일 뿐이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코를 팽팽 풀도록 울어도 하릴없이 하루하루 나이를 먹는다.


이렇게 내 삶에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었다.

앞을 봐야지.

선배가 회사를 떠나면서 고민했을 수많은 가정과 결론들을 생각하며 살아야지.

내 삶은 내 것이니, 더욱, 더더욱 신중하고 깊게 고민해야지.

이게 선배가 내게 남긴 마지막 교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