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제가 졌습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이렇게 기온이 떨어지면
흰머리 소년은 산책을 다니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들놈 입장에서는
집에서라도 왔다 갔다 하시며
조금씩 운동이라도 하면 좋겠다 싶어집니다.
하지만, 그 바람은 늘 같은 벽에 부딪힙니다.
흰머리 소년의 방 문은 굳게 닫혀 있고,
그 문이 열리는 유일한 순간은
안마의자에 앉으시는 시간뿐이시겠지요.
하기야,
그거라도 하루에 몇 번씩 이용하신다면
'아무것도 안 하신 것'보다는 낫겠지요. ㅎ
아들놈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흰머리 소년은
식사를 하건, 대화를 하건
본인에게 불리한 진술에 대해서는
아주 명확하게 거부권을 행사하십니다.
마치 평생 몸에 밴 헌법 조항처럼.
"아버지, 오늘은 추워서 밖에 못 나가셨겠네요?"
"집도 이렇게 추운데 어딜 나가냐?"
"그럼 집에서라도 왔다 갔다,
운동이라도 좀 하시지요?"
……
역시나 대답이 없습니다.
"아버지 가만 보면,
불리할 때는 말씀을 안 하시는 경향이 있어요."ㅋㅋ
그 말을 듣자마자 식사를 하시다
말고 갑자기 컥컥, 사례가 들리십니다.
찔리신 겁니다. ㅋ
사실 아들놈이 이렇게
유난을 떠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날씨가 추워졌으니 행여 감기라도 걸리실까 봐,
괜히 혼자 전전긍긍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2주 뒤면 캐나다에 이민가 있는
'말로만 효녀'에게 다녀오실 날이 잡혀 있습니다.
행여 감기라도 걸리면 그토록 바라던
비행기를 못 타실까 봐 그러시는 거죠.
그 속내를 아는데도 아들놈은 답답해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뵙고 올 것 같습니다. ㅋㅋ
그래서 요즘 흰머리 소년은
집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동면 모드'에 들어가신 상태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른의 행동이 아니라, 소풍 전날 비가 올까
걱정하는 어린아이의 마음과 닮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마음지기가
옆에서 슬쩍 한마디 합니다.
"자기… 일요일에 아버님 모시고
목욕탕이라도 좀 다녀와요."
그 말에 제가 괜히 튀어나온 반응을 합니다.
"나도 일요일에 할 거 있어요.
나도 하고 싶은 거 있다고요."
그 순간,
흰머리 소년이 제 눈치를 슬쩍 보십니다.
아마도 마음속으로는
'그래 나 때문에 네 일정 망치진 말자'
그러면서도
'그래도 목욕탕을 다녀오면 좋겠는데…'
그 두 마음이 동시에 오갔을 겁니다.
추위를 피하려고 집 안에 머무는 흰머리 소년과
그걸 핑계 삼아 괜히 더 걱정이 늘어나는 아들.
나이가 들어도,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이고
아들은 여전히 아버지 앞에서 마음이 바빠집니다.
이 겨울,
흰머리 소년은 감기를 피하려고 방에 머무시고
아들놈은 걱정을 핑계로 괜히 말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그런 투닥거림 속에서
우리는 또 하루를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함께 살아내고 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는 흰머리 소년이라도
목욕탕은 함께 다녀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