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효녀'는 좋겠다. ㅋ
어젯밤, 책상에 앉아 읽던 책을 정리하고
침실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흰머리 소년께서 주섬주섬 거실로 나오십니다.
밤 10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이 늦은 시간에는 거의 나오시지 않는데,
굳이 거실까지 나오셔서
티 테이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으십니다.
"아버지, 뭐 찾는 거 있으세요?" 물으니
쭈뼛쭈뼛 대답이 없으시다가 말씀하십니다.
"김을 좀 가져와야겠다..
날이 좀 풀리면 시장에도 나가 봐야겠고.."
엥? 갑자기? 김?
"집에 도시락김 아직 남은 게 있는데요?"
"아니, 캐나다 갈 때 좀 가져다주려고.."
순간 답답함이 확 밀려왔습니다.
캐나다에 가져간다고 '된장'을 챙겨야 한다,
'고춧가루'를 봉투에 담아라,
'택배로 온걸' 잘 포장해서 넣어라..
양이 꽤 되더군요.
뭘 이런 것까지 가져가나 싶었는데
오늘 마음지기가 캐리어에 차곡차곡 담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부족한 게 남았는지
캐나다에는 김이 귀할 거니까
대리점에서 좀 가져오라는 말이었지요.
순간 제 목소리가 날카로워졌습니다.
"그런 것도 '말로만 효녀'(동생)가 가져다 달래요?"
"걔는 그런 거 갖고 오지 말라는데,
내가 갈 때 좀 가져다주면 좋을 것 같다.."
"그럼 시장은 왜 다녀오셔야 해요?"
"바지를 하나 새로 사야 할 것 같다.."
말이 콱 막혔습니다.
지난번에 사드린다고 아웃렛에 가서 볼 때는
극구 싫다고 하시더니 마음이 바뀌신 겁니다.
좋은 옷 사드려도
'싫다'라며 장롱에 넣어두는 양반이
이럴 땐 왜 이것저것 필요해지는지,
괜히 서운함이 앞서 인상을 썼습니다.
"내가 몸이 좀 편하고, 날이 좋으면
너한테 부탁할 것도 없이 나갔다 오면 되는데...
어디 마음이 그러냐.."
그 말을 남기고 방에 들어가셨지요.
한참 책상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침실에 들어가며 말씀드렸지요.
"김, 내일 가져올게요.
시장은 금요일에 같이 가시죠."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책상에 앉았습니다.
내가 왜 어젯밤 그렇게 속이 상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외국 사는 딸한테 가는 길에
여기서 좋다고 하는 거 하나라도
더 챙겨서 가겠다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내가 속이 상했을까..
그깟 김 한 박스로 가져다드리면 될 것을,
시장에야 운전해서 잠시 다녀오면 되는 일을.
괜히 제 감정이 먼저 튀어나와
아들놈 눈치부터 보게 만든 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김을 챙기신 게 아니라
마음을 싸 들고 떠나실 준비를 하고 계셨던 건데,
저는 그 무게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포장해 가기 좋은 김을 갖고 퇴근했습니다.
마침 '말로만 효녀(동생)'과 통화 중이길래
제가 끼어들었습니다.
"야! 우리 집도 싸가실 판이다"
"아니야, 난 절대, 네버 가져오지 말라고 했어."
"아버지는 네가 가져오라 했다던데? 어?" ㅎㅎ
흰머리 소년 얼굴에서 난처한 기색이...
"아니야. 내가 가져가려고 그런 거지.."
"아버지는 다 싸갈 태세다. 넌 좋겠다."
셋이 전화기에 대고 농담으로 하루를 마쳤습니다.
아버지, 무엇이든 원 없이 가져다주세요.
아버지의 마음도..
아들놈은 밴댕이 소갈딱지입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