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과 핵심은 놓치며 살고 있습니다
작년 연말, 제 생일 선물 겸 새해 선물로 '마음지기'에게서 플랜 클린 플래너를 받았습니다. 가죽 표지부터 속지까지 한 세트로 받은 그 플래너는 제게 과분할 만큼 근사했습니다. 손에 쥘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 괜히 더 조심스럽게 다루게 되었습니다. 오래, 깨끗하게 쓰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그래서 출근할 때는 꼭 챙겨가지만, 배송을 나갈 때는 사무실 책상 위에 곱게 올려둔 채 그대로 두고 갑니다. 혹여 구겨질까, 더러워질까 싶어서입니다. 신선식품 배송을 하다 보면 손에 물기 묻을 일도 많고, 차 안은 늘 분주하니까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메모가 필요한 순간은 배송 중에 찾아옵니다. 운전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거래처에서 받은 중요한 전달 사항, 갑자기 걸려온 전화 속 약속들. 그때 제 손에는 깨끗한 플래너가 아니라 아무 종이나 영수증 뒷면이 들려 있습니다. 가장 필요한 자리에, 가장 아끼는 물건은 없었습니다.
책도 비슷했습니다. 다시 읽고 있는 책들을 보니 예전에도 꽤 여러 번 읽었던 흔적이 떠오르는데, 막상 표시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책은 깨끗해야 오래 본다’는 생각에 밑줄도, 메모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펼치면 묻습니다. 이 문장을 예전에 읽었었던가?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지?
결국 남은 것은 깨끗한 종이뿐이고, 제 삶에 남은 흔적은 희미했습니다.
책을 읽는 일은 책장을 깨끗이 유지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는 일일 것입니다. 플래너를 쓰는 일 역시 표지를 보존하는 일이 아니라, 다짐을 붙잡는 일일 것입니다. 떠오른 생각을 적고, 깨닫는 바를 표시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자주 펼치는 것. 그것이 본질이지요.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책 많이 읽으셨네요', '좋은 플래너 쓰시네요'라는 말이 따라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입니다. 책이 깨끗한 것과, 삶이 달라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이 당연한 이치를 오십이 넘어서야 깨닫고 있으니 스스로 미련하다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입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까요.
이제는 '보기에 좋더라'보다는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플래너 가죽이 조금 닳더라도, 종이에 구겨진 자국이 생기더라도, 사용해야 할 곳에 제대로 활용해야겠습니다. 결국 제 삶과 태도가 조금 더 선명해진다면 그걸로 충분하겠습니다.
아끼느라 쓰지 못한 시간과 물건보다, 써서 닳아버린 태도가 된 시간이 더 값지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본질과 핵심을 놓치지 않게 오늘을 살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