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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는 걷습니다.

물리치료사의 몸 이야기(걷기의 과학)

 걷기라는 키워드만 띄워도 수많은 책들이 검색된다. 바르게 걷는 법, 긷기의 효과, 걷기와 다이어트 등 일상적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현대인의 건강과 직결되는 것 중 하나이다. 그 뿐 아니라 걷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많은 것이 보인다. 요즘 나는 직업병일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 많은 것들이 보인다. 유심히 관찰하다 보면 성격까지도 보일만큼 걸음걸이는 우리의 다양한 면을 담고 있다.

 물론 나도 처음부터 사람들의 보행 분석이 쉽사리 되지는 않았다. 보행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한창 공부할 때는 헬스장에서 사람들이 줄지어 걷는 런닝머신 뒤에서 각각의 걷는 모습을 분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걷기, 즉 보행이라는 행위는 학문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보행이란 단순히 보면 여기부터 저기까지 보내주는 동작이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 해보자면 다리를 움직어 내 몸을 이동시키는 보편적 행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모양은 어린이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특히 병으로 보행 자체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분들께 걷는 모양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걷는데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행위가 복잡하고 중요한지.


 사람은 수많은 생물 중 가장 걷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종이다. 정상적인 발달 과정에 놓여있다면 그 누구라도 누운 자세에서 걷기까지 약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우리 아이는 1년도 안 되서 걸었어요.'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종종 있는데 골격이 완성되지 않은 시기에 어른의 욕심으로 걷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성장 후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참고하도록 하자.

신기하지 않은가? 가장 고등하다 여겨지는 인간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몸의 이동이란 결국 안전과 연결 된다. 하위 포식자 일수록 출생과 동시에 걷게 된다. 왜나하면 상위 포식자로서 자신의 안전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커다란 몸집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날카로운 발톱도 이빨도 없다. 그저 태어난 순간 목도 가누지 못한채 소리 질러 울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의 몸을 가누기 전까지는 최하위 포식자에 속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걷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걷는데 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며 특히 이 기간동안 뇌의 구조적 발달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약 1년이라는 덕분에 사람은 2족 보행과 손의 사용이 가능하게 된다.

 이를 증명하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흉수 부위가 절단된 고양이, 사람으로 따지면 하반신이 마비된 고양이를 묶어 트레드밀 위에 놓고 반복적인 보행 훈련을 시키게 되면 신기하게도 점차 걷는 동작이 나오게 된다. 이를 통해 일반 포유류 동물에서는 보행이 단순 반사적인 동작으로만 움직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중심 척수 생성기(Central patten generator)라고 하는 이론의 시작점이 된다. 이 이론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해도 많은 척수 손상 환자들이 희망을 가지고 트레드밀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자신들도 저 고양이와 같이 훈련만 하면 다시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트레드밀 위에서 내려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에게서는 그 효과를 크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행이 일정 부분 자동적 행위임은 맞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걸으면서도 걷는다는 사실을 크게 신경쓰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양한 행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을 포함해 2족 보행을 하는 유인원의 보행은 4족보행을 하는 포유류와는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뇌, 특히 대뇌 피질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이말인 즉슨 여타 동물과는 다르게 보행이 단순 반사의 산물이 아니며 더 복잡한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보행은 고차원적 구동 원리의 결과로서 충분한 준비 시간을 가지고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만 봐도 걷는 다는 것이 단순한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걷기 조차 우등한 자신에게 뿌듯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이 복잡한 동작이 어떠한 원인으로 인해 망가지게 된다고 가정했을 때 비교적 간단한 과정으로 움직이는 것들이 비해 되돌리기도 쉽지 않다는 사실로 귀결되어진다. 그렇다. 보행이 학문으로서 의미를 갖는 건 그 자체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발걸음 하나 떼는 것만으로도 환호하는 현장에 있다. 하루 만보를 걸으면서도 신경쓰지 않는 그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끔찍하리만큼 절박다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스스로 어떻게 걷는지 조차 자각하지 못하던 인간이 그 행위를 잃고 나서야 돌아보며 고치게 되는 것이다.


 무더위에 선선함이 그리워지는 여름 저녁. 당연함에 잊고 있을지도 모르는 걸음이라는 축복을 생각하면서 한 번 누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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