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반만 보이는 세상

편측 무시

 편측 무시. 뇌졸중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으로, 말 그대로 좌우 중 몸의 한쪽을 무시하게 되는 병세를 말한다. 주로 우측보다는 좌측 편마비에서 자주 나타나며 신체의 반이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기이한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방향을 잡는데 뇌의 입장에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정보 중 하나는 눈동자와 머리의 위치이다. 그런데 몸에서 방향성이 사라지게 되는 순간 병의 증세가 이 둘을 통해 그 형태를 드러낸다. 그래서 한 곳으로만 계속 향해있는 머리와 눈의 방향을 통해 편측 무시의 유무를 유추하고는 한다.

 이러한 이유로 대부분 환자의 고개는 한쪽으로만 돌아가 있다. 반대편을 보라고 해도 돌아보는 것은 잠시일 뿐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허나 정작 당사자는 아프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 스스로 불편함조차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하루 온종일 한쪽으로만 돌아간 탓에 굳어가는 목을 보며 속이 타들어 가는 건 보호자의 마음.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대편을 돌아볼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전혀 나아지지 않을 것만 같은 병세일 것 같지만 의외로 호전율이 높은 편에 속한 증상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뇌졸중으로 인한 병세들 중에서도 우선적으로 적극적인 치료가 들어가게 되고, 필연적으로 반대편을 돌아보게 하려는 강도 높은 질책이 뒤따른다. 다만 환자는 당연하게도 보던 방향만 본다.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그럴수록 더욱이 지켜보는 이들은 반대편을 보라는 반복된 주문을 할 수밖에 없는 노릇. 한 번, 두 번이야 그러려니 하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만 하루 종일 반복된 요구는 말하는 사람도 지치게 하는 법. 어느덧 짜증 섞인 채 뒤바뀐 목소리가 들려올 수밖에 없다. 치료사인 나라고 다를까. 처음에는 친절함이 묻어났던 치료도 점차 상투적인 표현으로 변해 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 번은 궁금함을 느껴 문답이 가능할 정도의 인지를 가진 환자분께 질문을 드려본 적 있다.      

“마비된 반대편이 어떻게 느껴지세요?”

당연스레 잘 모르겠다는 답변을 예상했으나 돌아온 답은 내 생각과 전혀 달랐다.      


“마치 낭떠러지가 있는 것 같아요.”


 너무나도 많은 의미를 담은 한마디였다. 이는 신체의 한 편이 사라졌다는 결여의 표현뿐 아니라 그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한다는 공포가 근간에 담겨있었다. 내가 이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단면을 넘어 그 반대편의 무엇을 본 기분이었다. 결국 공부했다고 하는 나조차도 그들의 전체를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을 뿐 그들의 세상을 반조차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내가 알던 객관적 사실보다도 감정을 깨닫고 나니 바뀌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였다. 그들을 위한 치료, 태도, 감정 등 많은 것들을 바꿨다. 특히 나의 생각보다 공포스러울 수 있다는 다른 한 면을 알고난 후 가장 먼저 바뀐 것은 바로 언어였다. 왜 반대편을 보지 않느냐는 질책보다는 조금 더 세상을 바라보아도 괜찮다는 안심의 언어를, 또 한쪽만 보고 있냐는 불편한 말이 아닌 반대편을 바라보면 조금 더 세상이 넓어질 수 있다는 희망의 언어로 말이다. 세상의 반이 사라진 이들에게 이해 이상의 공감을 전할수록 오히려 편안해지는 것은 나였다.     


 아픈 이들을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았다. 돌아보지 않는다면 볼 수 않는 사회의 단면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몰라서 볼 수 없는 세상의 많은 것들. 과학뿐 아니라 사상, 철학, 정치, 경제 등 내가 알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절반밖에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차마 보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이 얼마나 많을지 나로선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까? 사실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반쪽짜리 세상에 사는 건 우리 모두가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도 우리는 걷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