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곤 (2024.11)
‘위기(危機)가 곧 기회(機會)’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위기’의 원래의 뜻은 ‘위험’과 ‘기회’가 아니라 ‘위험한 시기’, ‘진정 위험한 시간’이다. 또 다른 기회의 뜻이 아니라 ‘중요한 시점’(incipient moment, crucial point)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John F. Kennedy 대통령이 국가적 위기때 “위기(Crisis)를 한자로 적으면 두 글자다. 하나는 위험(危險, Danger)이고 다른 하나는 기회(機會, Opportunity)”라며 위기(危機)란 말 속에 위험과 기회가 같이 들어 있음을 강조한 것이 계기가 됐다.
윈스턴 처칠은 “낙관주의자는 ‘위기 속에서 기회’를 보고, 비관주의자는 ‘기회 속에서 위기’를 본다”고 했다. 이런 명언들 덕에 누구나 ‘위기가 곧 기회’인 줄은 안다. 하지만 거꾸로 ‘기회(機會)가 곧 위기’인 것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기술 산업 지형의 변화를 뚜렷이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다(월스트리트저널). 2024.11.08부터 인공지능(AI) 반도체 선두주자인 엔비디아가 인텔을 밀어내고 미국 다우지수에 편입된다. 1999년 반도체 기업 중 최초로 다우지수 30개 종목에 포함됐던 인텔은 25년 만에 다우지수에서 쫓겨나게 됐다. 다우의 '반도체 기업 간판 교체'는 AI 시대로 산업 질서의 물줄기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엔비디아의 다우 '입성'과 인텔의 '퇴장' 배경에는 AI 열풍이 자리 잡고 있다. 엔비디아는 AI 붐을 타고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을 장악했지만 인텔은 PC와 서버용 CPU 시장에서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자만하다 빠르게 성장하는 모바일 시장 대응을 게을리했다. 뒤늦게 모바일용 프로세서와 통신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퀄컴을 비롯한 경쟁사를 따라잡지 못해 사업을 중단하거나 외부에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위기(危機)가 곧 기회’이듯 ‘기회(機會)는 곧 위기’이다. 인텔은 과거 엔비디아 인수와 오픈AI 투자 기회를 놓쳐 경쟁에서 뒤처지면서 시가총액이 4년 전의 3분의 1 수준, 900억달러로 급감하는 위험에 처하게 됐다. 엔비디아 주가가 2023년 약 240%, 2024년 약 170% 상승한 반면, 인텔 주가는 2024년 약 50% 떨어졌다.
인텔의 ‘퇴장’은 시대 변화에 맞춘 과감한 혁신과 투자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험에 빠지고 기술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이 상황에서 인텔과 함께 30년 가까이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았던 삼성전자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
2015.2월 삼성전자는 '3차원 반도체(FinFET·핀펫)' 기술을 기반으로 한 모바일용 반도체 양산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핀펫 기술은 삼성의 스마트폰을 더 얇게 만들고 배터리 사용 시간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핵심 기술이다. 하지만 당시 삼성의 핀펫 반도체 생산은 경쟁사인 인텔보다 4년이나 늦은 것이었다.
사실 삼성전자는 오래전에 이 기술을 선점할 기회가 있었다. 15년 전인 2001년 10월 이종호 교수가 삼성 반도체를 찾아와 자신이 개발한 '3차원 반도체 양산(量産) 기술'을 공개했었다. 그는 "소자의 구조를 3차원으로 바꾸면 소비 전력과 제품 크기를 줄이면서 성능을 크게 높일 수 있다"면서 "지금 3차원 반도체 기술에 투자하지 않으면 늦는다"고 호소했지만 삼성전자 임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이 교수는 결국 1년 4개월 뒤인 2003년 2월 인텔(Intel)에 이 기술을 이전했다. 인텔은 2011년 세계 최초로 핀펫 반도체 양산에 성공,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꼭 20년 전, 삼성전자에게 또 다른 변화의 기회가 있었다. 삼성전자가 거절한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OS)는 2주 뒤 구글에 5,000만달러(약 567억원)에 인수됐다. 앤디 루빈(Rubin)은 2004년 안드로이드 OS를 팔기 위해 삼성전자를 찾아와 "전 세계 스마트폰 제조사에 무료로 운영 체제를 제공해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사업 전략을 소개하며 제휴와 투자를 요청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그의 제안을 뿌리쳤다. "수천명의 우리 회사 엔지니어가 못하는 일을 직원 6명인 당신 회사가 한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삼성전자가 안드로이드와 제휴와 투자를 했더라도 반드시 성공했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지금처럼 구글에 완전 종속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두 회사가 경쟁력을 잃게 된 원인에 대해 기술보다 비용 절감에 치중했던 경영 전략, 수십 년간 1위 자리를 유지하며 나태해진 조직 문화 등 여러 공통점을 꼽지만 가장 핵심은 최근 2년 새 급격히 변한 AI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을 배우며 성장했고, 결국 극복한 삼성전자이지만 글로벌 시장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해 쇠락했던 일본 반도체 산업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예전 메모리 시장은 ‘치킨 게임(죽기 살기식 경쟁)’으로 가격을 낮춰 장악할 수 있는 ‘범용 메모리’ 위주였다. 하지만 고대역폭 메모리(HBM) 같은 인공지능(AI) 반도체는 메모리라 하더라도 고객 맞춤형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변화의 기회를 삼성전자는 잡지 못한 것이다. 반면 메모리 2등인 SK하이닉스는 고객의 요구 사항을 다 맞춰가면서 만들어줬다.
‘삼성전자가 위기’라고 한다. 위기는 특정 개인이나 조직의 목표 달성에 중대한 위협을 주는 상황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에 두 가지 조건이 추가된다. 하나는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일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짧은 시간 안에 의사결정을 해야 할 경우 위기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두 회사는 이런 시대를 예측하지 못했던 걸까. 적어도 삼성은 20년 전 지금의 상황을 예측했던 것으로 보인다. 23년 전 삼성경제연구소는 ‘반도체 산업’이란 보고서에서 “이제는 한순간의 방심과 전략 착오에 의해 생존이 엇갈리는 시대가 도래한다”고 했다. 마치 방심과 전략 착오로 AI 경쟁에서 밀려난 인텔과 삼성전자를 예측한 듯한 문장이다. 또한 “그동안 반도체산업 핵심 경쟁력은 선행 기술력을 기반으로 하는 대규모 생산 능력이었다면 앞으로는 점차 고객이 원하는 것을 신속히 공급할 수 있는 능력으로 바뀔 것”이라고 했다. 이 문장은 마치 “AI 가속기 핵심 칩인 고대역폭메모리(HBM)의 등장을 암시”하는 듯하다. HBM은 고객사 요청에 맞게 최적화하는 작업이 필수적이지만 삼성이 HBM 경쟁에서 밀린 것은 경쟁사보다 고객사와 긴밀하게 소통하지 못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뛰어넘을 차세대 인공지능(AI) 반도체로 지능형 메모리 반도체 PIM(Process In Memory) 등을 집중 개발한다고 한다. PIM은 데이터 저장(메모리)과 연산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반도체다.
‘기회는 곧 위기’이다. ‘기회 속에서 위기’를 보는 비관론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위기를 극복하면 기회가 찾아 오듯이 기회를 놓치면 곧 위기가 찾아 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삼성의 ‘위기가 곧 기회’가 될지 ‘기회가 곧 위기’가 될지 몹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