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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Choi May 07. 2022

센트럴 파크의 사람들

4월이 되던 날 아침, 청바지 한 벌에 후드티 두 장을 대충 싸들고 뉴욕으로 떠났다. 혼자 머나먼 타지에서 고군분투하며 공부하고 있는 여자 친구를 응원하기 위해서 비비고 즉석 국물요리도 몇 개 챙겼다. 외국에 살다 보면 이런 따뜻한 한국 음식을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지는 법이죠. 설렁탕에 만두를 몇 개 넣으면 멋진 만둣국이 완성되는데, 뜨뜻하고 구수한 게 식당에서 사 먹는 것만큼 훌륭하다. 물론 만두도 비비고 만두. 이렇게 만들면 가격이 거의 사 먹는 만큼 나온다는 게 함정이지만, 맛있으면 그만이죠.


맨해튼에 일주일 조금 넘게 머물면서 산책도 하고, 생일 파티도 하고, 반가운 친구들도 몇 명 만나고, 쇼핑도 하고, 전시도 보고, 즐겁게 잘 놀고 왔다. 뉴욕은 워낙 복잡하고 볼 것도, 할 것도 많은 곳이라, 별다른 계획 없이 떠났는데도 하루하루가 굉장히 바빴다. 아마도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바쁘고 복잡하고 화려한 도시일 테니까.


교토나 포르투 같은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에서 책이나 읽는 걸 좋아하는 내가 뉴욕이라니 어딘가 잘 안 어울리긴 하지만, 이 다양성의 도시에는 나처럼 조용하게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 아니, 분명히 있을 것이다. 뉴욕의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개개인이 어떤 삶을 살든 서로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받으니까요.


뉴욕에서의 이튿날 아침, 아침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센트럴 파크에 나갔다. 건물 사이로 바둑판처럼 난 골목을 걸어 나가다 보면 갑자기 하늘이 탁 트이면서 공원이 나타난다. 작은 터널을 지나 한강 시민공원의 커다란 하늘을 갑자기 만날 때나, 야구장 계단을 올라가서 경기장 하늘을 마주하는 기분과도 비슷하다. 정말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이죠. 센트럴 파크의 설계 철학이 ‘도심에서 자연으로 최단 시간 탈출’이라니, 그 말이 딱 맞다.



아침에 센트럴 파크에 가면 저마다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러너들과 반려 동물들과 가족들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이른 4월의 아침은 아직 선선하고,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고, 기분 좋게 마른땅 위로 수많은 러너들이 숨을 쌕쌕 몰아쉬면서 달리고 있다. 젊은 남녀는 말할 필요도 없고,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멋진 운동복 차림으로 느린 속도지만 쉼 없이 달린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부들,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는 꼬마들, 자기 몸집보다 큰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어린이 야구 선수들과 응원하는 엄마 아빠들, 신나서 똥꼬 발랄하게 뛰어다니는 강아지들. 이런 푸르른 공간에서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들과 동물들 속에 있다 보면 왠지 나도 활기차지고 행복해지는 기운을 받는 것 같다.


특히 강아지들의 종이 정말 다양한데,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커다랗고 늠름한 친구들부터, 바닥에 착 붙어서 인상을 잔뜩 썼지만 꼬리는 기분 좋게 돌아가고 있는 불독, 중국 영화에서나 보던 사자개, 털이 복슬복슬한 푸들,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트램프 같은 친구들도 만날 수 있다. (슈나이저 종이라고 하네요.) 불과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는 동안 평생 보아온 것보다 더 다양한 종의 강아지들을 만난 것 같다. 아참, 귀여운 다람쥐도 볼 수 있다!



원래 목표는 어퍼 웨스트 동네에서 공원을 가로질러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는 거였는데, 걷다 보니 시차의 피로가 밀려와 그냥 돌아와서 늘어지게 한숨 잤다. 사실상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낮잠을 몇 시간 자고 나온 거나 다름없는 시간이니까. 여행의 묘미란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지만 그것도 그 나름대로 즐겁다는 것이죠.


그 다음 날도 센트럴 파크에 아침 산책을 나갔는데, 마라톤 대회를 하는지 전날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번호표를 달고 달리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 9시였는데! 정말이지 부지런한 사람들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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