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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Choi May 25. 2022

데일리 브레드

지난번에 이어서 부지런한 뉴욕 사람들 이야기를 계속해 본다.


어퍼 웨스트에서 센트럴 파크에 들어가 잠깐 걷다 보면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저수지’라는 이름을 가진 커다란 호수를 만나게 된다. 런던에 가면 한 블록 건너 King’s 어쩌고, Queen’s 저쩌고가 있는 것과 비슷하게, 미국도 짧은 역사이지만 나름의 레거시가 여기저기 지명에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미국 사람들은 밖에서 보기엔 정치적으로 꽤 치열하게 나뉘어 싸우는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기리는 것에는 꽤 열려있는 편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누군가가 이름을 붙이고, 사람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안 쓰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 커다란 호숫가 둘렛길을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꽤 박력 있는 속도로 조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천천히 걷고 싶으면 한쪽으로 바짝 붙어서 지나쳐가기 쉽게 길을 터놓고 걷는 게 낫다. 그렇지 않으면 무수히 많은 ‘익스큐즈 미’를 듣게 된다. 다행히 여기 러너들은 대체로 친절한 편이라, 샘 윌슨을 추월하는 스티브 로저스처럼 지나쳐 갈 때마다 “왼쪽”, “오른쪽”을 외치면서 모욕감을 주지는 않는다.



산책을 마치고 다시 웨스트로 빠져나가 빵을 사러 간다. 빵집 이름은 <데일리 프로비전 Daily Provisions>. 대충 ‘데일리 브레드 - 매일 먹는 빵을 파는 빵집’이라는 뜻이겠죠. 예전부터 크룰러가 그렇게 맛있다고 해서 인스타를 팔로우하고 있었는데, 사진에서나 보던 파란색 간판이 눈앞에 나타나자 반가웠다. 빵집에 들어서면 센트럴 파크의 활기찬 느낌과는 조금 다른 활기찬 분위기가 가득하다.


샌드위치랑 베이컨 소시지 같은 브런치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두드리는 사람들, 그날의 빵 - Daily Provisions - 을 사러 들른 동네 주민들, 우버 이츠 가방을 메고 커피와 빵을 픽업하려고 줄을 선 바이커들로 복작복작 붐비는 작은 가게. 그 붐비는 가운데에서 드레드 머리에 화려한 티셔츠를 입고 활기찬 목소리로 호명을 하면서 주문한 음식을 건네주는 홀 서버, 바 건너편에서 열심히 음료를 제조하는 바리스타들, 그리고 그 안쪽에서 열심히 빵을 반죽하고 굽고 있는 셰프들까지. 그야말로 평화롭고 활기찬 뉴욕의 아침이다.


갓 구운 메이플 크룰러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크룰러는 그날 아침에 정해진 수량만큼만 굽기 때문에 오전 중에 다 팔린다고 한다. 크룰러의 생김새를 대충 보니 던킨에서 비슷한 걸 먹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뭐 예상되는 그 맛이겠지 - 했는데, 막상 한 입 베어 물고 보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맛이다. 아마 빵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 입 베어 물고 나면 환호성을 지르게 될 거라고 장담한다.



우선 겉면에서는 달콤한 메이플 시럽 향이 나고, 처음엔 바삭하게 씹히는데 단면은 부드러우면서 쫄깃하고, 안쪽까지 씹는 순간 달콤하고 고소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예전에 먹었던 퍼석퍼석한 크룰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빵이다. 베어 문 단면을 보니 구멍이 뽕뽕 뚫려 있고 촉촉한데, 아마도 이게 비밀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손이 텅 비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맛에는 이유가 있다. 데일리 프로비전을 만든 사람이 쉐이크 쉑 Shake Shack을 만든 대니 마이어 Danny Meyer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소호나 타임스퀘어 인근의 관광 지구가 아니라, 조용한 어퍼 웨스트의 골목에 데일리 브레드를 파는 빵집을 만들었다고? 당연하지, 매일매일 동네 주민들의 일상을 채워주는 일용할 양식이 훨씬 소중하니까 -라고 ‘데일리 프로비전’이라는 간판이 말하고 있는 듯하다.



뉴욕이 세상 부지런하고 활기찬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는데, 사실은 그냥 아침에 운동을 하고 매일 빵을 사 먹는 것이지 특별한 건 아니다. 실제로 가 본 데일리 프로비전 역시 인스타로 보며 생각했던 것처럼  화려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소박한 동네 빵집에 가까웠다. 우리가 ‘서울’을 생각할 때 화려한 명동이나 강남거리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간극이랄까.


하지만 여행의 묘미는 에어비앤비의 슬로건처럼 ‘살아보는  Live there’이라고 생각한다. 현지 사람들의  속으로 들어가보면  소박하고 활기찬 아침 속에서 나의 ‘여행자 모드 발견하게 되니까. 화려하고 유명한 여행지를 찍고 다니는 것도 좋지만, 동네 빵집에서 만나는 데일리 브레드가 주는  다른 감동이 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용할 양식이 사실은 작고 소중한 행복의 덩어리들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달까.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모든 순간을 충실하게 느끼면서 살아가는 . 다시 없을 것처럼 하루를 만끽하는 .  서울에서도 휴가를 내고 놀러만 다닌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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