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봤다. 사각사각 연필 스케치로 등장인물들이 그려지면서 걸어 나오는 인트로에서부터 전율이 흘렀는데, 곧바로 점프볼이 시작되자 송태섭의 말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슬램덩크의 오랜 팬인 나에겐 정말 선물과도 같은 영화였다. 아마 모든 슬램덩크 팬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요. 컷으로만 보이던 장면을 3D 애니메이션 기술로 입체적으로 구현해 내니, 정말 살아 움직이는 농구 경기가 되어 박진감이 엄청났다. 마치 만화책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퀄리티 높은 애니메이션 기술에다가, 장면 장면마다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음악 사용, 게다가 장면마다 이어지는 명대사의 향연까지. 타케히코 이노우에 작가가 이 만화를 그리면서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것이었구나 싶었다.
만화책으로 거의 7권에 해당하는 경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나오다 보니 스토리가 전체적으로 그려질 뿐만 아니라, 명장면의 연속이라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명장면 다음에 또 명장면, 또 다음 명장면.. 이런 느낌이랄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주인공들이 저마다 보여주는 한계를 돌파해 내는 이야기의 힘이었다.
송태섭, 정대만, 채치수, 서태웅, 강백호 - 북산고등학교 농구부의 주전 선수 다섯은, 모두 자신보다 체급이 뛰어난 선수들을 처음으로 맞부딪혀 그동안 승리 공식이었던 것들이 통하지 않는다는 장벽에 가로막힌다. 장점이 통하지 않으니 약점만 부각되는 상황. 하지만 20점이 넘는 점수차로 뒤쳐지고 있는 장면에서, 안감독의 한 마디가 이 모든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해 낸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
이 모든 드라마의 결말을 다 아는 상황에서 다시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로 영화를 보면서, 그 승리의 순간보다도 더 눈부시게 빛나고 멋졌던 순간은, 각자가 자신의 약점을 마주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 지점이었다.
포인트가드 송태섭은 원작에서는 늘 거만해 보일 정도로 여유로운 캐릭터로 그려졌지만, 사실 어릴 적 먼저 세상을 떠난 형의 그림자를 뛰어넘지 못했고, 천재 가드 이명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후반전 시작과 함께 시작된 산왕의 존 프레스 압박 수비에 막혀 공격의 시발점이 되어야 할 역할을 시작조차 못하고 있던 상황. 그가 어영부영하는 사이 점수차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만다.
만화를 너무 오래전에 봐서, ‘아 저 장면에서 송태섭을 잠깐 교체했었던가..’ 하고 생각했었는데... 안 감독은 오히려 네가 돌격대장이니 뚫어내라고 더 등을 떠밀어 버린다. “송태섭 군, 여기는 태섭 군의 무대입니다.” 그리고 송태섭은 안 감독과 한나가 믿어준 그대로 - ‘넘버원 가드’ 답게 - 자신의 작은 키와 형의 그림자, 그리고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뚫어낸다”. 키가 작은 선수니까 가장 잘할 수 있는 스피디한 드리블로.
정대만은 그동안의 공백으로 인한 체력적 한계를 마주한다. 전반전 상대방의 밀착 수비로 체력을 소진한 그는, 하지만 그 한계를 인정하고 후반전에는 다른 데 체력을 쓰지 않고 오로지 슛에만 힘을 쏟는다. 카운트해보지는 않았지만, 점수로만 보면 가장 많은 기여를 한 선수가 그가 아닐까.
팔을 올릴 힘조차 없던 그가, 패스가 오면 기계처럼 공을 쏘아 올리고, 공은 깔끔하게 림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찰랑’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 소리에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은 불꽃처럼 다시 살아난다.
주장이자 골 밑을 책임지는 센터 채치수에게 신현철이라는 상대는 자신이 그동안 상대해 왔던 라이벌들과는 차원이 다른 선수였다. 센터의 기본인 힘과 수비력에서도 앞서는 데다가, 패스와 화려한 기술, 3점 슛까지 갖춘 지금까지는 없던 유형의 센터. 하지만 채치수는 혼자만 전국제패를 외치던 1, 2학년 때와는 달리, 이제는 함께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은 묵묵히 궂은일을 수행하며 팀 멤버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는 사실도.
문득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댄스>에 나온 마이클 조던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록 채치수의 농구 스타일이 마이클 조던을 모델로 한 것은 아니지만요.) 프로 데뷔 후 6년 간 무관에 그치면서 쓸쓸히 고군분투하던 모습, 승부욕의 화신처럼 굴며 다른 멤버들을 몰아붙이고 엄격하게 굴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 그리고 막 나가는 데니스 로드맨과 부상으로 신음하는 스코티 피펜을 각자 스타일에 맞게 다루며 그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던 원숙한 리더로 성장한 모습까지.
적수가 없을 것 같던 농구 천재 서태웅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의 한계점을 만난다. 정우성이라는 또 다른 천재를 만나 1대 1로 계속해서 지고 마는 것. 하지만 처절하게 패배하고 있던 그 순간에 오히려 서태웅은 웃음을 짓는다. 그래, 이런 맛이지 - 하는 느낌으로. 1대 1은 승리에 이기기 위한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수수께끼를 풀어낸 그는 패스를 통해 다른 선수들을 활용하고, 1대 1 돌파와 패스와 슛 - 유연한 공격 방식으로 상대를 뒤흔들어 결국 한계를 극복해 낸다.
강백호는 슬램덩크 시리즈의 주인공답게 만화책 처음부터 끊임없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강점은 쉽게 알려진 대로,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피지컬 - 점프력과 스피드, 그리고 엄청난 허슬 플레이다. 실제로 그는 그런 장점들을 활용해 오펜스 리바운드를 잡아내고, 루즈볼을 잡아내며, 더블 블로킹을 성공해 내며 팀원들의 약점을 메워주고 파이팅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강백호의 가장 큰 약점은 기초가 약하다는 점. 기본적인 슛이나 패스 실력도 부족할뿐더러, 중요한 순간에 더블 드리블이라는 초보다운 실수를 범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그는 스스로의 가장 큰 약점을 극복해 내며 마지막 역전골을 성공시키며 팀을 승리로 이끈다.
만화책을 여러 번 본 팬이라면 아마도 눈치챘겠지만, 그는 경기 내내 같은 자리에서 공을 달라고 계속해서 손짓을 한다. 한 번도 기회가 주어진 적은 없었지만. 그리고 2만 번 점프슛 특훈을 했던 골대 오른쪽 45도 자리 - 경기 내내 계속해서 공을 달라고 외쳤던 바로 그 자리에서, 경기 종료 직전 농구의 가장 기초 중의 기초인 점프 슛으로 역전을 성공시킨다. 처음 농구를 시작할 때부터 외쳐대던 멋진 슬램덩크가 아니라 가장 평범하고 기본적인 점프 슛으로.
인트로 스케치 장면부터, 마지막 공격 장면을 만화책에서처럼 속도감 있는 연필 선으로 묘사하며 그 유명한 대사 - 왼손은 도울 뿐 - 마저 뮤트로 처리하는 연출까지 숨 막히듯 멋졌지만, 가장 좋았던 장면은 등 부상으로 쓰러졌던 강백호가 처음 농구를 시작했던 장면 - "농구 좋아하세요?" - 을 회상하던 그 짧은 찰나의 장면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농구 앞에서는 지금의 약점이나 한계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아”라고 북산고 선수들이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아서.
천재 중의 천재로 묘사된 정우성이 처음으로 경험한 패배가 오히려 아름답게 여겨졌던 것도 이 때문이다. 어릴 적 만화책에서 봤을 땐 그저 최강의 악역으로만 생각됐는데, 복도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그의 모습은 그 역시 한계를 만나고 좌절하는 하나의 사람이고 어린 학생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와닿았다. 그 역시 이 한계를 마주한 경험을 토대로 멋지게 성장해 내겠지.
그래서 주인공들이 극복해 내는 순간들도 멋졌지만, 본인들의 한계를 마주하며 당황하고 좌절하는 그 순간들마저도 정말 눈부시게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와 좌절로 가득했던 나의 20대가 떠올랐기 때문일 수도 있고,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허슬하고 있는 지금에 대한 위로를 받는 것 같기도 해서.
이번 영화에선 스토리 진행 상 생략된 장면이지만, 나는 쓰러진 강백호가 처음 농구를 시작하던 순간을 회상하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채소연을 붙잡고 고백하듯 말하는 이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 문장의 목적어는 그녀가 아니라 농구일 거라고 믿는다.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면서도 정말 좋아하는 무언가를 즐겁게 하는 순간이 바로 그에겐 영광의 순간이니까.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