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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mer Jan 09. 2019

작가의 시간

이제 쉰을 바라보는 작가 한 강이 만 스물 아홉 어디쯤 쓴 수필집을 읽었다. 아이오와 대학에서 제3 세계 작가들을 초대해 숙박을 제공하는 삼개월간의 프로젝트 기간에 대한 기록이다. 이방인 혹은 외국인으로서의 고독하고 염세한 혼란의 기록을 기대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쉽게 설레고 관대하며 따뜻하고 말랑하다. 대부분의 서점에서 절판이라 작년 연말부터 어디서 사 읽나요 노래를 불렀는데 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동생이 인터넷 중고 서점에서 구해 보내 주었다.


중딩 때 우리가 리뉴얼한 도서실에서 김영하를 첨 읽었는데 그 때 선생님이 김영하, 음. 이해하기 어렵진 않아? 하고 물어봐 자존심이 상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내 손에 들려있던 것은 이십대 중반의 젊은 그가 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였다. 09년도에 만 열살이 된 이 소설집의 작가의 말을 어제 처음으로 읽었다. 거기엔 지극히 염세적이고 많은 것을 외면하기에 아름다운 삼십대 중반의 김영하가 있었다.


어려서 한국 소설을 많이 읽진 않았지만 김영하만은 꾸준하게 팔로업했는데, (허영일 수도 있고ㅋ 김영하는 허세로 읽기 시작하기 쉬운 소설이 많다ㅋ) 한 때 그는 노란 블로그에서 문장들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온라인에서 활발했다 (프로 작가의 일상적인 글을 블로그를 통해 볼 수 있다니 동시대 독자의 행운 아닌가).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즈음 평론가 소조와 무엇이 예술가를 예술가답게 하는가, 마련되어야 할 사회 안전망에 대한 논쟁 후 온라인에서의 절필을 선언했다. 그 논쟁 또한 생각해 볼 거리가 많다...... 그 후에도 그의 소설들은 꾸준히 읽었지만 사실 이야기를 읽으며 오는 순수한 전율과 설렘은 연작소설 <퀴즈쇼>가 마지막이다. 사실은 내가 변한 것이라. 어느 연도의 나는 아무리 읽어도 설레지 못하는 나에게 이제 소설에 전율하긴 글렀나봐 하고 생각했었다.


김영하는 동시대의 인기 작가 몇처럼 직접적으로 작품을 통해 사회 이슈에 의견을 표하는, 혹은 고유한 역사와 시대 상황에 기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는 아니었다. 까닭에 (몇년 전까지만 해도)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작가의 국적과 무관하여 읽기 쉬웠다. 정치를 혐오하고 무관하고자 했다는 그는 단 몇 년전 쯤 길고양이의 묘권을 말하는 정치인을 지지하는 글을 썼다. 나는 믿어보기로 했다 하고 시작하는 글 또한 작가 아니랄까봐 아니 정치적인 글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는가 싶다.


알뜰신잡에 나오는 김영하는 오래된 은사의 얼굴처럼 반갑기도 했지만 이젠 대중이 사랑하는 다 가진 어른같아 나는 삐딱해졌다. 특히나 논란이 된 온라인 사진 도용 폭로에 언급되었을 때의 침묵은 사랑받는 메이저한 자의 오만함이며 비겁함일까 싶어 슬펐다. 우리 오빠가 변했어요 같은 기대치만 있는 팬심을 내심 비웃어왔는데 이제부턴 그러지 말아야겠다...


김영하란 사람의 소설들이 나에게 시간순으로 읽혀왔다면 맨부커상으로 존재를 알게 된 한 강의 경우 되려 역주행해가는 중이다. 작가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은 묘하다. 특히 나와 같은 나이에 쓴 수필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읽다보면 이런 문장을 스물 아홉에 쓴 그였기에 저런 문장을 쓸 수있었구나, 이같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느꼈기에 이런 사람들과 그런 이야기를 했으며 그런 사랑을 받았기에 지금의 소설이 나왔구나 하는 개연성이 보인다. 한 작가의 작품 활동 또한 서사가 긴 이야기였다.


유독 더웠던 지난 여름 베를린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나는 그 중 하나를 읽었다. 한 강이 어렸을 적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한 날의 일기였다.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안경알에 맺혔다. 앞에 앉아 계신 노부부 내외가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셔서 하품한 시늉을 했다. 눈물에도 종류가 있다면 그것들은 마음이 저려와 고개를 피하게 되는 것들은 아니었고 친한 친구와 얼굴을 마구 일그러뜨리면서 양팔 벌려 껴안고 펑펑 울 만한 따뜻한 것들이었다. 이 산문을 읽다보면 한강의 끝나지않은 유머와 재치에 슬며시 웃음마저 난다.


스물 아홉의 젊은 작가는 그의 꿈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시인은 시를, 소설가는 소설을 낭독하며 독자 혹은 청자들은 언어의 이해와 상관없이 그것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의 구현이다. 내 친구의 나라에선 루나캘린더로 하여 이 시기쯤 Yalda Night 이 (밤이 가장 긴 날이기에 의역하면 동지이다) 열린다. 친구와 가족들이 모여서 먹고 마시고 자정이 넘어서까지 시를 읽으면서 과일, 단 것들, 또 너트들을 나눠먹는다. 특히 석류와 수박의 붉은 색은 crimson hues of dawn and glow of life-의 의미를 가진다. 재작년 나는 그곳에서 루시드 폴의 아직 있다란 노래를 들려주면서 영어로 번역된 게 있는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를 들려줬다. 올해는 조금 더 현대적인 (사실 시를 읽는 인간은 아니라ㅠ 선택의 폭이 좀 좁다) 이 훤의 이민자를 대략 번역해 읽어줄 생각이었다. 시는 다행히도 쉽다, 아래와 같다. 




한 시절을 다 발음하니, 먼 곳이었다 구 년이 지났고 스물하나의 표정을 대게 잃어버린 청년은 남편이 되었다. 덜 자란 말들을 두고 온 땅이 그리워 가끔 머리를 반대편에 두고 잤다. 밥 먹듯 Excuse me를 하는 사람들이 fuck을 밥풀처럼 뱉을 때, 그들은 대체 무얼 소화한 걸까. 치즈처럼 늘어지는 단어들일 생각한다. 늘어지다 끊어지고 또 배달되지 못한 광경들을

오늘은 무얼 먹을까. 매일 노동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장을 보고 세금 보고서를 끊으며 시민과 이주민을 오가는 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쓰는 일 찍는 일뿐이어서

타국어로 더 자주 불리는 날은

조금 더 이방인 같다. 단어와 단어, 얼굴과 얼굴, 모국과 조국 사이에서 생각보다 자주 체한다. 나에게도 외부인이었던 내가 이방인이 될 때 나는 누구의 이방에 거하는가. 간혹 그려보는 것 강해져 있는 자. 바깥이 되어버린 모국과

모국의 국기와

그 가장자리

주목된 적 없는 세 줄의 독백을 생각한다. 이제는
집이 돼버린 곳에서

집을 생각한다. 소화 안 된 언어들이 뒤섞인 채로 일기장에 쏟아지고

먼 나라 국기처럼

이민자의 밤이
잠시 펄럭였다 안착한다.

시인동네 , 2017, 110~111
이민자(Immigrant), 이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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