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한가운데.
Intro
전혜린의 입을 빌린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읽었다. 작년 겨울에 데려왔는데 일년 반동안 머리맡에 모셔 두었다. 지난번에 읽을 땐 그렇게 안 읽히더니 근 며칠간 줄어드는 분량이 아쉬워 손톱을 물어 뜯는 마음으로 읽었다. 슈트트의 스타벅스에서 신부 들러리드레스를 고르러 간 친구를 기다리며 이미 반을 돌파했다. 블라블라카에서 4시간동안 떠들어대는 이제는 좀 들리는 줄 알았으나 여전히 하나도 모르겠는 언어를 피해 읽다가 멀미가 나 그만두었다. 어느 도시의 아베 플라츠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읽었다. 친구는 인터넷이 없어 길 위에선 연락이 되지 않는다, 약속 시간이 지나 터덜터덜 걸어올 것이다. 한 달 동안 250MB가 가능한 휴대폰 계약을 4년간 쓴 나는 그 마음을 알기에 친구를 타박하지 않는다. 불편한 말을 해야하는 자리에 가기 몇 시간 전 편의점에 들렀다. 라떼 한 잔을 앞에 두고 마지막 장을 덮었다. 마시던 걸 원샷하고 남을 기만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 자리에 갔다.
리얼리티
이건 한 사람 만을 위한 혹은 그 사람에 대한 20년이란 시간에 걸쳐 쓰는 다른 한 사람의 일기이기도 하고, 어렸을 때 헤어져 서로 영향을 미칠 것도 없었던 언니와 동생이 다시 만나, 그럼에도 이해 받고 이해 하기 위해 서로를 가늠해보려는 자매의 대화록이기도 하다. 덕분에 한 여자의 과거와 현재 완료, 현재- 긴 시간을 읽는다.
언니와 동생, 일기의 기록자 등 사람들은 일단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미세한 균열을 보이고 대립하는 듯 군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들이 한 작가가 본인의 이상향을 쪼개어 만든 가상의 인물들이면 내가 실망할까 걱정될 정도로 한 방향의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이것이 루이제 린저 한 사람에 의해 쓰여졌고 또한 전혜린이란 한 사람에 의해 번역되었기 때문에, 더군다나 두 사람 모두 시대를 관통하는 혹은 뛰어넘는 일관된 것을 쫓았던 여성이기에, 과연 니나 부슈만과 슈타인, 마르게레트나 알렉산더 같은 사람들이 현실적인지, 이들을 1930, 40년대 뮌헨에서 찾아볼 수 있었는지 의심스러웠다.
이 같은 몰입은 참 오랜만이다. 책을 읽으며 가장 기쁜 순간은 사실은 작가의 마음 나아가 이 사람의 마음이 내가 아는 마음일 때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동질감에 반갑다. 그런 책은 드물게, 그렇지만 사람보다는 종종 나에게 온다. 그래서 그것이 책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넘어 과거의 어디일지라도 존재했던 누군가이길 바랬다. 루이제 린저 자신의 부분이어도 괜찮고, 지인의 어떤 면들이길 원했다. 1930년도 뮌헨에 존재했던 사람이기를, 비록 나는 그를 만날 수 없지만.
이같은 몰입은 니나 뿐만 아니라 슈타인 역시 마찬가지다. 전혜린은 슈타인을 충실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굳이 니나와 슈타인 중 누구의 삶을 지향할래 물어온다면 고민의 여지없이 슈타인을 선택한다. 한결같이 자신의 몫에 성실한 삶, 잘못된 선택에 대한 대가를 받아들이는 삶, 내 마음이 가는 대상에 대해 충실한 삶, 내가 동경하는 삶이다. 사실 니나의 생의 한가운데이기도 하지만 슈타인의 생의 한가운데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슈타인을 자유롭고 열정적인 니나를 강압하는 기존의 굴레라고 여기기도 했지만 아니라고 나는 심지어 단언한다. 니나 역시 그 사실을 알았다. 슈타인과 니나의 삶은 대립하였다기보다 한 방향 위에 서있는 한 사람이 그 방향으로 가고자 할 때, 노이즈의 업앤 다운 정도의 갭이 있을 뿐이었다. 사실은 슈타인과 니나는 아마도 한 사람의 다른 면이었을 것 같다. 그는 또한 어두운 밤길을 걸으며 생각할 것이다. 니나의 언니가 니나를 보며 그 외로움의 정체를 처음으로 느꼈다고 말했듯이.
이제까지의 밑줄은 아래와 같다.
1. 생기 -계속-
2. 유희
"우리는 이렇게도 될 수 있고 또 전혀 다르게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끼게 돼. 우리는 변신할 수 있고 자기 자신과 유희할 수 있어. 책을 읽었을 때 우리는 책 속에 있는 이 사람 또는 저 사람과 같다는 걸 알게 돼. 그리고 다른 책을 읽었을 때는 또 다른 모습과 같은 걸 알게 돼. 이렇게 끝없이 계속되곤 해. 사람은 몸을 굽히고 자기 자신 속을 들여다보면 몇백 개의 나를 볼 수가 있는 데 그중의 하나도 참 자기가 아니야. 아마 그 몇백 개를 다 합치면 정말 자기일지도 모르지."
유희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변신 하는 것에 대해 안다. 그것이 자기 자신과 유희하는 것이라는 걸 역시 안다. 한 때 어설프게 다른 모습에 다르게 반응하는 사람들과 다른 대화가 가능한 서로 다른 관계를 시험해 보았다. 당시의 시간을 함께 했던 영민한 동기들은 그 시도를 알아 보았다. 그 중 어떤 것은 몇년 후의 나에 의해 부정당하거나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원하는 카드를 내놓듯이 그런 얼굴들을 하고 그런 어투로 말한다. 진심이고 나의 부분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전혜린의 유희라는 표현은 카드 게임에서 이기는 카드를 내놓은 자, 그러나 이겨봤자 딱히 이득이랄 것도 없는 게임을 유희하는 자의 얼굴처럼, 적당한 가벼움과 산뜻함, 유쾌함이 느껴져 좋았다.
3. -계속-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