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뤼메 May 31. 2019

직접 겪지 않아도 인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드라마 <SKY캐슬>을 보고


전과목에서 틀린 2문제

오열하던 친구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어렸을 때 일을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 충격적이었던 사건이나 일은 꽤나 세세하게 기억이 나고는 한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친했던 친구가 있다. 머리를 올빽으로 묶은 후 뒷머리를 승무원 머리처럼 고정하고, 잔머리가 하나도 나오지 않도록 바른 젤 덕분에 그 친구의 머리를 만지면 딱딱해진 머리카락이 느껴지고는 했다. 머리스타일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친구의 부모님은 매우 엄격했다. 그래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친구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었다.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반에서 1등은 물론 전교에서 1등을 거의 놓치지 않는 아이었다.


 이 사건이 있었던 날은 시험을 친 직후였다. 중간고사였는지, 기말고사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시험을 다 마친 후 우리는 이 친구에게 달려가 시험답안을 맞춰보고는 했다. 항상 100점 아니면 96점이었으니 우리에겐 이 친구의 시험지가 답안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답을 맞혀보러 친구에게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시험이 끝나자마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나는 놀래서 친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친구는 2문제나 틀렸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한 과목에서?'라고 반문하며 진짜 큰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는 아니라고 했다. 전과목에서 2개나 틀렸다고 했다. 그러며 '오늘 난 끝났어.'라고 말했다.


 어린 나였지만 그때도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한 과목에서 2개 틀린 것도 아니고 전과목에서 2개 틀린 걸로 부모님이 자식을 혼내봤자 얼마나 혼낼까. 그런데 시험성적이 정확히 나온 후 다음날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와 나에게 들려주는 친구의 이야기는 지금 생각해도 가히 충격적이었다.


 자기가 전과목에서 2개 틀린 걸로 왜 그렇게 큰일 난 것처럼 울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자기는 항상 올백 아니면 1개를 틀리는 것까지만 허용된다고 했다. 이번에 전과목에서 2개를 틀린 성적표를 들고 집에 갔을 때 엄마는 가방을 벗고 꿇어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동생도 그 옆에 호출되었다고 했다. 엄마는 가만히 자기 맞은편에 도마와 칼을 들고 앉았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말 없이 도마 위로 칼을 툭툭 찍어 내렸다고 했다. 그렇게 하다 한참 뒤에 말했다고 했다. '어떻게 전과목에서 2개를 틀리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친구와는 내가 이사를 가며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하지만 내가 살던 곳은 작은 곳이고 어떻게든 돌고 돌아 서로의 사는 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될 때가 많다. 특목고를 진학했다 내신관리가 어려워 다시 내가 사는 고향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전교권을 유지했다고 했다. 결국 그 친구는 서울대에 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 친구는 그럴만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 <SKY캐슬>을 보는 내내 나는 초등학생 때 만나서 같이 놀던 이 친구가 생각이 났다.


이 드라마를 보며 나는 입시전쟁을 치르지도 않은 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각개전투였다. 물론 부모님께 열심히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많이 듣긴 했지만, 어디서 공부를 할지, 얼마만큼 공부를 할지, 어느 대학교를 진학을 할지도 모두 내가 결정을 했다. 부모님은 그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노력을 해라'라고 말씀해주셨고, 내가 듣고 싶다 말하는 수학 과외, 논술과외, 인터넷 강의 등에 대한 금전적인 지원을 해 주실 뿐이었다. 사실 이때 쓴 돈들은 정말 아까운 돈 낭비였다는 생각이 든다. 인강, 과외에 몰빵한 돈을 모아서 세계일주나 하고 올걸. 이건 부모님과 나의 의견이 일치하는 몇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든 내가 고3일 때의 우리 엄마는 진진희네 엄마 같았달까. 자식이 공부 잘해서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또 몰아붙이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래도 공부를 잘해야 세상을 살아가기 편할 텐데 라는 생각의 반복을 통해 딱 부러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끊임없는 갈등을 하지만 결국은 자식을 사랑해서 자식에게 지는 사람.


 이런 나와 달리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압박과 지원 속에서 공부를 해야 했던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다. 그 친구는 사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부모님의 의견에 착실히 따라왔으나,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기 시작했다. 중2 때까지 잘 따라왔기에 부모님은 더더욱 갑갑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자기 자식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 친구는 결국 부모님의 뜻대로 가지 않았고, 부모님의 뜻을 이어 나가준 건 이 친구의 동생이었다. 부모님의 뜻대로 자라나는 동생 덕분에 그 친구는 지금이라도 부모님이 자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종종 이 친구와 얘기하다 보면 아직도 서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살얼음판을 걷는 중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공부가 뭐길래!

공부가 뭐길래?


가끔 '공부'라는 단어만으로도 너무 갑갑하게 느껴져 "도대체 그놈의 공부가 뭐길래!"라는 말을 내뱉으려라다가, 어쩐지 조심스러워지며 눈치를 살피게 될 때가 많다. 내가 '공부가 뭐길래!'라고 말하기엔 명문대에 가지도, 뭔가 다른 일을 통해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대학진학거부'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려대학교 학생이 대학교를 자퇴하며 이런 행보를 보여준 것에는 응원했지만, 지방대생 이런 문제를 제기했을 때 사람들이 '지가 지방대니까 그렇지'라는 냉소를 보내는 장면을 많이 봤었다. 그래서 이런 말은 이미 정점까지 다 찍어본 사람만이 외칠 수 있는 문장이라는 압박을 느낄 때가 있다. '네가 뭘 해봤다고 공부에 대해서, 학벌에 대해서 말해? 가져보지도 못한 자의 핑곗거리 아닌가?'라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직접 가져보지 않았다고 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을 느끼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가진 자만이 외칠 수 있는 특권이 아니라 모두가 인식할 수 있는 사회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직접 해보지 않아도 인식할 수 있는 문제들은 세상에 많고, 이것에 대한 해결책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래서 드라마 <SKY캐슬>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소식을 모르지만 서울대에 간 친구가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라마 <SKY캐슬>
아들. 공부하기 힘들지?
엄마는 우리 수완이가 아빠처럼 의시가 됐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우리 아들 고생하는 거 보면 그냥 행복하게, 건강하게만 자랐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마음이 바뀌어.
사실 엄마도 뭐가 맞는지 잘 모르겠어. 이게 맞나 싶다가도 답이 없잖아.
우주 엄마처럼 줏대도 없고, 예서 엄마처럼 확신도 없고,

아들. 엄마가 미안해.

- 드라마 <SKY캐슬> 대사 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