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동네에 경양식집이 생겼다.
완전히 새로운 맛으로 판도를 뒤엎다_명동돈가스 P.16
일본이 이 요리를 많이 먹게 된 사연에는 한국도 관련이 있다. 7세기 불교도인 덴무 천황의 명으로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다는 기록처럼, 본디 일본은 근대에 메이지유신으로 고기를 전면 허용할 때까지 고기 소비가 억제된 나라였다. 오죽하면 멧돼지를 잡아먹으면서도 돼지고기라 말하지 못하고 산고래라고 에둘러 표현했겠는가. 그런데 오랫동안 고기 소비가 억제되었던 만큼 1960년대 고기 소요량의 큰 증가에 공급이 빠르게 대응하기란 어려웠다. 공급은 늘 부족했다. 이때 한국은 좋은 대안이었다. 가까웠고, 돼지를 기르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배로 일본까지 나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김해에 대단위 축산단지가 조성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게 지배적인 견해다. 미국으로부터 사료가 싼값에 들어왔고, 한국도 역사상 처음으로 대량으로 돼지 사육을 하게 되었다.
이 거래는 한국의 식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돈가스에 적합한 등심과 안심을 부분육으로 수입해 가자 남는 부위가 많았다. 이때부터 족발, 순대, 머리와 사골을 이용한 순대국밥, 돼지국밥, 삼겹살, 갈비가 우리 외식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노포의 장사법>(박찬일, 인플루엔셜, 2018.04.25.)
오늘의 점심은 오랜만에 옛날 돈가스를 먹었다. 오늘은 금요일이니 맨날 먹는 김치찌개나 순댓국은 패스해 본다. 수프, 빵, 콩, 그리고 매운 고추와 쌈장까지 옛날 돈가스는 참 거부하기 힘든 맛이다. 보통은 밥을 남기거나 같이 나오는 양배추를 남기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넓은 접시에 담긴 모든 것을 먹어치웠다. 많이 먹은 이유로 더욱 눈에 띄게 튀어나온 배를 보며 오늘은 점심 후 달달한 커피는 죄책감으로 마시지 않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며 압구정동에 진짜 햄버거 가게라고 불리는 맥도널드가 생겼고, 동네에도 패티에 닭머리를 갈아 넣었다는 괴담의 햄버거 가게들이 등장했다. 사라진 동네 햄버거 집들은 양상추 대신 양배추가 들어가 있었고 미국 길거리에서 파는 핫도그 빵에 소시지를 올린 것부터 계란프라이가 올라간 햄버거까지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대학가와 동네에 경양식 음식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경양식은 말 그대로 '가벼운 양식'으로 푸짐한 양식 메뉴 중에 돈가스, 생선가스, 함박스테이크와 빵, 음료로 구성된 메뉴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대학생이던 누나를 따라 처음 간 경양식집은 돈가스를 시키면 밥을 먹을지 빵을 먹을지 물어보았고, 후식으로 커피, 사이다, 콜라 중 하나를 선택하는 재미가 있었다. 먹고 나서는 배를 두드리며 누나에게 또 돈가스 사달라고 부탁하였지만, 누나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착한 누나도 용돈이 뻔했을 테니 이 세상의 고민을 하나 더 얹어준 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지내다가 우연히 놀러 간 명동에서 맛본 명동돈가스는 내가 알던 돈가스가 아니었구나 싶었다. 튀김옷만 두툼했던 돈가스가 아닌 등심이 가득한 돈가스는 비주얼부터 차이가 느껴졌다. 생일에 명동돈가스에서 밥을 먹고 명동을 쏘다니며 살다가 나이도 들고 먹을 것이 풍족해지는 시절을 보냈다.
살면서 돈가스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다. 직장인이 된 이후 돈가스는 예전같이 용돈을 모아 맛보는 음식이 아니라 점심을 때우는 국수, 김치찌개 옆의 다른 선택지의 메뉴가 되었다. 돈가스는 이미 너무 흔해졌다. 그냥 남산에 놀러 가면 아이와 함께 돈가스를 먹거나, 부암동을 산책하다가 기사식당에서 파는 두툼한 돈가스를 먹고 오는 정도였다. 최근에는 남산돈가스나 일본식 돈가스를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식품코너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먹은 옛날 돈가스는 눈앞에 큰 접시에만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 필요 없이 주고받는 대화도 필요 없이 "아, 맛있네요!"라는 말이면 충분했다. 모든 음식은 배고플 때가 가장 맛있다는 말을 통해 그저 배고픈 직장인들의 점심은 뭘 먹어도 맛있는 건가 싶다가도 오늘은 왠지 옛날 돈가스를 먹어야 한다는 동기가 생각났다. 옛날 사람은 옛날 돈가스를 좋아하나 싶었다. 뭐 옛날 사람도 옛날 돈가스에 대한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싶다. 맛은 추억에서 나온다고 말하던 황교익 맛칼럼니스트의 말처럼 나도 예전엔 돈가스 집에서 참 행복했었는데 하며 추억에 빠지며 점심 먹었더니 언제 퇴근하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