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군 후포항~영덕군 영덕역
동해바다 도보여행길인 해파랑길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직장 때문에 한 달에 2~3일씩 나눠서 여행하고 있습니다. '해파랑 일기'라는 제목으로 도보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파랑길 23코스(울진군 후포항) ~ 20코스 (영덕군 영덕역)
6월 5일~6일 맑음(후포~고래불~영해 ~축산항~영덕역)
아재의 몸살
이번 여행의 첫날, 게스트하우스 '하품'의 여사장이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왜 걷고 계시는 거예요?' 나는 미소와 함께 걸으면서 도대체 왜 걷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있다고 대답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왜 걷느냐고? 타인들 뿐 아니라 스스로도 가끔 자문해 본다. 왜 걷느냐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몸살을 앓고 있다. 40대 초반에 정신없이 살아온 30대를 돌아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큰 몸살을 앓았고 도보여행을 통해 나름의 방향을 보고 살아왔다. 십 년이 지난 50대가 되어서 십 년 전과 같은자리에서 또 한 번 몸살을 앓고 있다. 사춘기 십대들은 부모님과 기성세대에 저항하고 또래 친구들과 교감하며 인생의 몸살을 극복한다. 40~50대 여성들은 갱년기라는 몸살을 가족들과 스트레스를 나누며 힘겹게 보내는 듯하다. 하지만, 50대 아재의 몸살은 공유할 만한 사람이 없다.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운동을 해보기도 한다. 가끔은 아내와 이야기를 나눠보기도 하지만 자기 이야기에 능숙하지 않은 아재들은 금방 한계에 부딪힌다. 나는 몸살을 극복하는 처방으로 여행을 선택했다.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느새 치유되고 있는 나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몸살을 치유하기 위해 걷는다. 도보여행은 나에게 치유의 공간이다.
여름날 도보여행
후포항에서 영해까지는 날씨 때문에 쉽지 않았다. 선글라스에 시원한 소재의 얼굴 가리게를 착용하고 팔토시까지 했지만 여름 햇볕을 온전히 견뎌낼 수는 없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반바지를 입어서 햇볕에 완전히 노출되었던 종아리는 수포가 생기고 있었다. 걷는 동안 느끼지 못했지만 숙소에 들어가 저녁이 되면 쓰라리고 아파서 힘들었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집에 돌아갔을 때, 얼굴과 종아리를 보고 날아올 아내의 잔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해서 웃픈 얼굴을 짓게 된다.
이전 도보여행에서도 7,8월에 걷다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갔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한여름 여행은 피할 예정이지만 6월 여행도 한낮의 걷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세 번째 날부터 한낮의 더위는 온천이나 카페에서 피해서 걷게 된다.
세 번째 날은 걷다가 칠보산 온천을 만나서 땀을 식힌다. 물집이 난 종아리를 위해 냉탕에 들어가 열을 식혀주고 탕 안의 간이침대에 자리를 잡고 잠깐이지만 꿀 같은 낮잠을 청한다. 10여 년 전 8월 한여름 아들 녀석과 도보여행을 하다가 쓰러지기 직전에 익산의 왕궁온천을 만나 더위를 식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입대한 아들 녀석은 이 더위에 훈련을 잘 받고 있는지...
고마운 사람들... 택시기사님, 자전거 여행자
여행 세 번째 날과 마지막 날은 별다르게 특별한 일은 없었다. 핸드폰을 잃어버렸던 일만 빼면 말이다. 영해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어제 여행의 종착지였던 경정마을로 가기 위해 영해면의 콜택시를 불렀다. 나이가 지긋하고 친절한 기사님과 여행이야기를 나누며 오늘의 출발지인 경정마을에 도착해서 배낭을 메고 택시에서 내렸다. 이어 택시는 출발하고 나도 배낭을 고쳐 메고 여행 어플을 작동시키기 위해 반바지 주머니의 핸드폰을 찾았다. 그때서야 핸드폰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침 6시, 주위에는 차 한 대 보이지 않았고, 주위에 민가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아직 이른 아침시간이라서인지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막막함이 엄습했다. 오늘 동해안 쪽에서 산을 넘어 영덕역에 가야했다. 2시 기차를 예약했기 때문이다. 다시 영해로 되돌아가서 콜택시를 찾고 핸드폰을 찾아서 여행을 계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황스럽고 절망스러웠다.
절망감에 반쯤 넋을 놓고 있을 때, 영해 쪽 내리막길에서 자전거 한 대가 오르막길을 한 번에 올라갈 요량으로 전속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전거를 향해 양손을 흔들었다. 이른 아침 인적없는 지방도에서 180cm가 넘는 거구의 남자가 배낭을 메고 자전거를 불러 세웠음에도 자전거는 다행히도 멈춰주었다. 안동을 향해 자전거여행 중이라는 여행자는 내 사정을 듣고는 흔쾌히 핸드폰을 빌려주었다.
내 핸드폰에 3번이나 전화를 했는데도 답신이 없었다. 반 포기한 상태에서 4번째 전화를 했을 때 택시기사님이 전화를 받으셨다. 영해로 돌아가는 2차선 지방도에서 핸드폰이 울려서 차를 세울 곳을 찾아야 했고, 뒤편 좌석을 확인하고서야 핸드폰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기사님은 하차지점으로 돌아오려면 1-20분 정도 걸릴 거라며 안심 시키셨다. 그제야 안심을 하는 내 모습을 본 자전거 여행자는 다행이라며 각자의 여행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오르막길을 향해 힘겹게 페달을 밟아 올라갔다. 그의 힘든 뒷모습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택시기사님이 오셨고 끝내 거절하시는 추가요금을 억지로 주머니에 넣어드리고 감사하게 핸드폰을 넘겨받았다.
국내 여행이든, 해외여행이든 나름 많은 여행을 하며 느낀 점은 세상에 따뜻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이다. 물론, 어디든 나쁜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나쁘고 못난 인간들보다는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타인에게 선한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이 이 세상이다.
유난히 가벼운 발걸음으로 바람개비가 돌고 있는 영덕군의 산을 하나 넘어 영덕역에 도착했다. 근처의 지인들을 만나 점심을 먹고 영덕역에서 서울을 향한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렇게 3박 4일의 이번 여행을 마감한다.
해파랑길 여행을 잠시 중단하며...
지난해 가을 강원도 고성의 해파랑길 50코스를 시작으로 경상북도 영덕군의 20코스까지 30개 코스를 여행했고, 영덕부터 부산까지 20개 코스를 남겨놓은 시점에서 도보여행을 잠시 중단해야 할 일이 생겼다. 회사의 인사발령 때문이다. 조금 먼 곳으로 발령이 나면 이왕 시작한 여행이니 마무리를 하고 싶지만 발령지가 전라남도 완도의 도서지역이어서 해파랑길 여행의 마무리는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해파랑길 여행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남해안의 남파랑길 여행을 해볼까 생각하다가 다른 아이디어가 번득 스쳐 지나갔다. 이왕 완도로 발령을 받았으니 섬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평생 언제 다시 도서지역에서 살아볼 기회가 있겠는가? 이 기회에 수려한 완도의 섬들을 여행하고 그 기록을 남기면 어떨까 하는 고민을 해본다. 8월 현재, 나는 완도로 발령받았고 날씨가 좀 선선해지고 생활이 익숙해지면 완도 일대의 섬여행으로 해파랑길 여행을 이어가려고 한다. 완도살이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