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못한 이별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몸뚱이는 TV와 닮았다.
현실적이면서 현실적이지 못하다.
정제된 이미지를
한 발짝 떨어진 채 바라보는 듯한 거리감.
그래서일까.
사장님이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사장님이 나를 끊어내려 할 때조차
‘그럴 줄 알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장님은 조금 길게 말을 돌렸다.
죄책감을 덜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끝까지 내 책임이라며
질책하고 싶었던 걸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낯설고 어려운 건
‘일단 알겠습니다’라는 내 대답 이후
찾아온 침묵이었다.
사장님은 나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 눈빛은 명백히
‘무언가를 더 원한다’는 표현이었다.
그 순간이 가장 괴로웠다.
내가 뱉어야 할 말이 남았던 걸까.
사과를 해야했나
감사하다고 말해야 했나
마음이 고장 나면
이게 문제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 막힌다.
잠시 뒤 사장님은
필요한 행정 절차를 안내했다.
하지만 말투와 시선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알고 싶었다.
참 우습지 않나.
내 감정은 그토록 꼴 보기 싫어 묻어두면서
타인의 감정엔 일말의 찌꺼기라도 좋으니
그걸 핥아먹고자 아등바등이다.
사무실에서 나와
자리로 가는 짧은 걸음만큼
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 찼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일까
묵혀둔 감정이 터지기 적기가 아닐까.
의자에 조심히 앉으며
떠오른 건
‘아, 이거 지금 위험한 상황 같은데?’
즈음의 애매한 직감이었다.
그것뿐이다.
딱히 무너지진 않았는데
어디 하나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너무 많은 걸 했다.
나 치곤 너무 많이 참았고.
많이 생각했어.
그러니까…
딱 한 달만 쉬자.
아니, 한 달은 너무 길다.
일주일만 생각 없이 멍청히 쉬면서
앞으로 뭘 할지 생각해보자.
글?
그래, 글은 미련이 남았으니
한 달 정도만 미친 척 매달려 보자.
그게 안 되면
그땐 미련 없이 포기하자.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거야.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에
나는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기분은 평온한데,
이상할 정도로 깊은 피로감이
나를 짓눌렀다.
꼭 그 무게에
내 숨을 꺼질 것만 같았다.
미래도, 감정도,
지금은 그냥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지금은 그저
아무 감정 없이 하루를 쉬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그리고 다음 날
사장님은 나를 다시 불렀다.
말없이 스쳐간 눈빛의 정체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건 ‘배신감’과 ‘실망감’이었다.
사장님은
내가 적어도 감정을 드러낼 거라 믿었다.
분노든 변명이든
아니면 염치없이 매달리기라도 할 줄 알았다고.
하지만
내 태도는 지나치게 조용했고,
그 조용함은 마치 모든 걸 준비한 사람의 그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감정보다 먼저 눈치를 키워야 하나.
그저 맥없는 농담이나 떠오른다.
어쨌든, 해명하려는 내 모습에
사장님은 내 말을 믿지 못하고
수상쩍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 모든 게
의심이라는 감정으로
재포장되는 과정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일은
꽤 씁쓸했다.
그날 저녁,
산송장 같은 몸을 질질 끌고
집에 돌아왔다.
삶을 유지하겠다는 오기 하나로
정해둔 루틴을
의무적으로 반복했다.
밥을 먹고, 정리하고,
책상에 앉는 모든 순간이
기계와 다를 바가 없다, 생각했다.
루틴을 끝마친 뒤
나는 눈으로 멍하니
천장의 사각 틀을 따라가며 생각했다.
피곤하다.
말 그대로,
육체도 감정도
바싹 말라간다.
할 말도, 할 일도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딘가로 다시 나아가야 한다는 직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건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