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 좋아하면 더 그러지 말았어야지.
널 좋아해서 그랬어.
어릴 때 같은 반 남자애가 아무 이유없이 날 밀치며 내 급식을 엎은 적이 있었다. 뜨거운 약밥과 국이 들어있던 그 급식판은 내 온 몸을 향해 쏟아졌고 아픔에 놀라 엉엉 울고 있는 선생님은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 아이가 널 좋아해서 그런거니까 용서해줄래?' 그 뒤로 나는 약밥을 다신 입에 대지도 않았고 왜 약밥을 그렇게나 싫어하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얼버무리기만 했다.
내가 먼저 헤어짐을 고한 사람이 있었다. 그 뒤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는 내 의사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연락을 해왔고. 몇번은 내가 알바하는 곳까지 찾아와 손님의 신분으로 나를 지켜봤다. 감정에 미련이 남아서 라고 했다. 그 사람이 그런 행동들을 그만두기 전까지 나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정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대학시절 내내, 정말 매 해마다 날 희롱하거나 추행하려던 사람들이, 아니 XXX들이 있었다. 사과를 요구하자 놀랍게도 그들은 사과 대신, 자신과 교제하자는 고백을 내놓았다. '너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거란 이유와 함께. 그 후 나는 대학 생활 내내 그들을 피해다녀야 했다.
인턴쉽의 상사가 '바지 대신 치마를 입고 다녔으면 좋겠다', '나이 차이 별로 안나니까 오빠라고 불러' 등의 언행을 일삼았다. 이런식으로 대하시면 정말 힘들다고 말하니 상사는 '니 반응이 재밌어서 그러는거야. 너가 싫다곤 하지만 좋아하는거 같아서.' 라고 대답했다. 그 후 얼마 안가 나는 사직서를 냈다.
나는 분명히 싫다고 했다. 당신도 분명히 들었다.
내가 이 모든걸 아직까지 기억하며 괴로운 이유는 뭘까, 곰곰히 생각했다. 진짜 싫어서였다. 나는 일분 일초도 그들의 선택에 긍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싫다고 해도 싫다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위의 이상한 법칙때문에 나조차도 이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단순히 좋은 마음으로 하는 행동이였는데 그런 호의를 거절하는 나야말로 잘못된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에게 나는 '상대방의 호의에 감사할줄 모르는 사람', '윗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 '좀 좋아해준다고 콧대만 높아진 사람' 등의 단어들로 그들에게 정의되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점점 상대방 대신, 내 자신에 대한 검열을 시작했다. 싫다고 할 때 정말 싫은 투로 말했는지, 웃음기 같은 건 없이 정색하고 명확한 표현을 썼는지. 나중에라도 여지라도 줬니 따위의 말이 나오지 않기 위해여서였을까, 나는 정말로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까지 표현했어도 내 싦음의 무게는 그들에게 참으로 가벼웠다. 그도 그럴게, 학습능력이 1도 없는 그들은 내게 다시금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좋으면서 말만 그렇게 하는 거 다 알아." 라고.
좋아해서 그랬다는 말, 이것이 호의가 아닌 그저 폭력이였다는 걸 깨달은 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무기로 휘두르던 그들은 점점 아무런 죄책감 없이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했다. 마치 내 인격은, 내 안의 마음은 그들에게 아무 상관이 없는 듯이 오로지 그들의 의지대로만 날 대했다. 좋아한다는 마음에 비해 그들의 이런 행동은 모순 투성이였고, 난 그런 그들에게 점점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 한참 잘못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로맨스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장면들, 싫다고 하는데 강제로 팔을 잡아당겨 키스를 하는 장면이나, 헤어진 상대방의 집에 한밤중에 취한채로 찾아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장면들을 보며. 내가 떠올린 건 애틋한 사랑이 아닌, 소름끼칠 정도의 두려움이였다.
좋아하면 더 그러지 말았어야지.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말은 절대로, 용서 받지 못할 일에 대한 변명 따위로 쓰여선 안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함을 변명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깨달아야 한다. 그들이 하고 있는 건, 누군가를 진정으로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행동이 아닌 그저 그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비틀린 생각일 뿐이라고.
나는 사실, 싫다라는 말이 싫다는 의미로 통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는 제발, 내가 당신에게 긍정하지 않음이 내 잘못이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내 자신마저도 좋아함을 변명삼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