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전 제게 벌어진 일이 수치스럽지 않아요.

by 정지은 Jean


넌 정말 후회하는 일이 있어?

"응. 있었어.” 무덤덤하게 나는 대답했다. 언니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내 쪽을 쳐다봤다. 장난스럽게 시작한 질문에서 그런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 못한 듯한 얼굴이였다.


사실 내겐 예전에 오랫동안 후회했던 일이 한가지 있었다. ‘내가 그 날, 그 장소, 그런 상태로 있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후회. 이 후회는 내가 갓 스무살이 되던 해에 시작되었다.




한 선배가 있었다. 같은 과 선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선배이자 나 또한 평소에 많이 믿고 따르던 사람이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주위에선 그 선배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여자 후배들의 몸을 만지거나 동의 없이 입맞춤을 하는 등의 그 선배가 저지른 일련의 성추행 사건들이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회의 끝에 결국 이 사건들은 공론화시키지는 말자는 결론으로 마무리지어졌다. 받았던 상처를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마음들, 그리고 가해자에게 낙인을 찍는 것보다 피해자라고 지목되는 일이 더 두렵다 분위기 때문이였다.


이런 분위기의 배경에는 피해자가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수치’스러워야 된다는, 지극히 잔인하면서도 잘못된 프레임이 씌여져 있었다. 수치스럽다는 말은 ‘스스로를 부끄러워 하거나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하다는 뜻’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람들은 그 마음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들에게 떠넘겼다.


이 인식은 모두를 상식에서 비상식의 경계로 이끌었다. 피해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일련의 사건들은 대자보 한 장 조차 없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고, 그 일들에 대해 다시는 누구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 괴물에게 낙인을 찍는 것 대신, 우리 사이를 자유롭게 활보하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그렇게 쉬쉬하며 넘어갔던 그 다음 해 여름방학, 나는 그 선배의 다음 피해자가 되었다.





과사람들과 간 MT에서 술에 취한 선배는 내가 먼저 들어와 자고 있던 방에 들어왔다. 술기운에 정신이 오락가락 하던 내가 곁에서 인기척을 느낀건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서서히 내 몸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 당기기 시작했고 꺼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던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다음 날 내게 남겨진 기억의 파편들 속엔, 내게 벌어진 성추행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날 밤의 의도는 명확했다. 결코 그 다음날 그가 쏟아낸 변명처럼 술 때문에 흐릿하거나 왜곡되지 않았다. 그 후 한동안 꿨던 꿈엔 그의 잔상이 보였고 그 잔상은 날 몇번이고 그 날 밤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그 후 그는 내게 변명들이 가득한 사과와 함께 조용히 학업을 마무리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뒤 얼마 채 지나지 않아 나는 그가 캠퍼스를 당당히 활보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의 중심에 둘러쌓여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선배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선배의 눈이 마치 '너만 말하지 않으면 다 괜찮은데 왜그래?' 를 말하고 있는것만 같았다.


내가 한동안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짊어져야 했던 그 무게가, 그에겐 그저 어떻게 해보려다 실패한 조그마한 기억 따위였단 걸 깨달은 순간 내 머릿 속에 이어진 상식이란 끈이 끊어지는 걸 느꼈다. 그에겐 그 누구도 잘못 되었다 말하지 않은 그 날의 무게가, 나와 달리 참으로 가벼웠던 것이다.




그 뒤 한번씩 내게 벌어진 일들과 비슷한 뉴스들을 우연히 보곤 했다. 기사의 댓글엔 늦은 시간에 같이 술을 마신 것이, 그 상태로 정신을 잃은 것이, 이성과 한 방에 있었던 것이, 옷을 그렇게 입고 있었던 것이 암묵적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동의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수치스럽길, 자신의 행실을 부끄러워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 후, 난 내게 벌어진 일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내게 벌어진 일은 내가 부끄러워하며 숨겨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침묵만 하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 사람들과 웃고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내에서 내 자신을 추스리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 어느 날, 우연히 나는 그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들을 불러 술을 사주며 청첩장을 나눠줬고, 그 이야기를 나는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들의 입에서 들어야 했다. 그 순간 내 심장은 다시금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한결같이 내 반경 안에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수치심 따위가 아니였다. 내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느낀 감정은 격렬한 분노 그 자체였다. 나한테 그런 일을 저지른 것도, 죄책감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모자라, 아직까지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주위에서 활보하는 그 뻔뻔함에 역겨움이라는 감정이 올라왔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게 벌어진 일에 대해 내가 해야했던 일은 수치심을 느끼며 방관하는 것 따위가 아니였다는 것을. 가해자에게 명확한 낙인을 찍어 그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한 무게를 뉘우치게 하고, 다른 이들도 조심할 수 있게 사회에 경보를 울리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했던 최소한이자 최선이였던 것이다.





단 한명이라도.


'너가 처신을 잘못해서 그런거야' 라는 말 대신, "그 XX 완전 미친 XX네! 아주 그 XX XX를 따다 바삭바삭 갈아서 김장을 담궈버려!" 라고 소리쳐 준다면. 나와 함께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로 인해 또 용기를 낼 사람이 생기고, 가해자들이 다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면. 이 오랜 침묵을 깨는 것이야말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용기라고 생각했다.


난 내 잘못이라고 할까봐 두려웠던 사람들부터 내게 벌어진 일에 대해 슬퍼할 사람들에게까지, 그 날 일에 대해 입을 열었고 가감없이 이야기했다. 놀랍게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내가 두려워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나를 여전히 지지했고, 그들은 날 여전히 사랑했다. 오히려 이 반응을 놀라워한 내 자신이, 나야말로 피해를 입은 피해자였다는 걸 잠시 잊어버린 내 자신이 어리석어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나는 비로소 내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침묵은 절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침묵은 방관을 낳고, 방관은 또 다른 범죄를 낳는다. 그러기에 침묵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는 가해자라는 괴물이 범죄와 함께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제발, 지금 누구라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혼자서 고통받고, 자신을 탓하고, 침묵해야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성범죄는 결코 피해자가 '수치'스러워 해야하는 일이 아니다. 가해자를 방관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 상식임을 알아차리고 비상식에 순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글로 인해 조금이나마, 내 안의, 당신 안의, 그리고 우리 주위의 침묵을 깨어 나갔으면 좋겠다.


이것은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너무 오래 걸린 나의 간절한 부탁이기도 하다.




언니가 다시 물었다.

“있 ‘었어’... 과거형이네?

이젠 후회 안한다는 뜻이야?”


“응. 이젠 후회 안해. 후회란거 말이야... 자신이 한 선택이 관여된 일에 대해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뉘우친다는 말이잖아. 나는 그 일이 있고 나서 줄곧 그 날 그 장소에 그런 상태로 있었던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게 벌어진 일에 대해 후회했던 것 같아.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렇더라. 돈을 도둑맞은 사람한테 ‘너가 부자처럼 보이게 비싼 옷을 걸치고 다녀서 그렇잖아.’ 라고 할 수 없고 길 가다가 폭행을 당한 사람한테 '너가 약해 보여서 맞은거잖아.’ 라고 할 수 없는 것 처럼. 문득 다 똑같은 범죄인데 왜 내게 벌어진 일만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지?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 내가 그 날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정작 내게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이야.


그래서 이제 후회 안해. 그리고 앞으로도 안할거야. 잘못한 사람은 내가 아니란거, 이제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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