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논란에 관하여
예전에 카페에 잠시 책을 읽으러 갔다가 우연히 서로 데면데면해 보이는 두 남녀의 옆 자리에 앉게 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때마침 들려온 옆자리 남자의 말은 독서에 몰두하던 내 집중을 모두 다 빼앗아가기에 충분했다.
혹시... 페미니스트 '그런 건' 아니죠?
이 질문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마시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코로 뱉을 뻔 했다. 이전의 대화가 어떤 맥락이였는지,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의 어떤 저의가 담겼는지 너무나도 훤히 보이는 이 질문에 나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이내 숨을 고르곤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곧바로 이어진 그녀의 대답은 날 탄식할 수 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저 페미니스트 ‘그런 거’ 아니에요~
그 말을 하는 여자의 표정이 궁금해 흘끔 쳐다 보니 그녀는 상대방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사람은 봤어도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며 해명하듯 말하는 사람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한국에서 겪은 이런 에피소드들은 내게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페미니즘을 언급하는 것 만으로도 ‘페미나치’ 같은 단어로 불리며 웹상의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는 경우,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 만으로도 사회생활의 불이익으로 작용하는 경우 등... 페미니즘이 언제부터 사람들이 기피하는 ‘그런 것’이 되었는진 잘 모르겠지만, 한국사회의 어떤 구석에서 정의하는 페미니즘은 본래의 개념보다는 ‘여성우월주의’에 가까운 듯 보여 씁쓸할 때가 많다.
최근에 한국의 매체에서 접하는 뉴스들만 해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여성 아이돌인 손나은이 인스타에 올린 ‘Girls can do anything.’ 이라는 문구가 쓰여진 폰 케이스의 사진이 페미니즘을 의미한다는 이유로 일부의 팬들의 비난을 받고 결국 손나은 본인이 해명을 하게된 사건이 있었다.
그 폰 케이스는 평소 내가 애정하는 브랜드인 '쟈딕 앤 볼테르(Zadig & Voltaire)'에서 나온 디자인인데 문구 자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번역하면 말 그대로, ‘소녀들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다. 그럼 '여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야 손나은은 논란을 피할 수 있었던 걸까. 논란을 일으킨 이들은 2018년에 살고 있지만 한결같은 조선시대 남존여비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광고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패션 업계에서 일을 해오고 있다. 브랜드 별로 최신 컬렉션에 대한 가이드를 작성하다 보면 페미니즘을 심볼로 컬렉션을 기획하고 의상을 디자인하는 많은 브랜드들을 접하게 된다. 예를 들어, 프라다의 SS18 컬렉션은 페미니즘을 표방하며 여성의 힘에 대한 의미를 담은 피스들을 선보였고, 그 외에도 디올, 키아라 페라그니, 프라발 구룽 등...의 브랜드들 또한 페미니즘이 담긴 디자인을 발표한 패션 브랜드들로 잘 알려져 있다.
만약 페미니즘이 여성우월주의고 이 모든 브랜드들의 디자이너들이 여성우월주의자라서 가능한 일이었다면 왜 그들에겐 웹상의 익명의 공격이나 불매운동을 비롯한 항의가 빗발치지 않았을까. 오히려 왜 이 브랜드들은 많은 대중들의 응원과 사랑을 받고 있는 걸까.
명확히 하자.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가 아니다. 가끔 페미니즘이 여성만 항상 좋게 대접해줘야 하는 ‘역차별’의 온상처럼 표현하는 사람이 있던데, 페미니즘은 정확히 말하면 남녀평등주의다.
사전적 정의를 따져봐도 페미니즘이란 ‘정치, 경제, 개인, 사회 전반의 성평등을 실현하고 정의하는데 목적을 두며, 여성과 남성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계급, 인종, 종족, 능력, 성적 지향, 지리적 위치, 국적 혹은 다른 형태의 '사회적 배제'와 더불어 생물학적 성과 사회·문화적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없애기 위한 운동'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제이지와 비욘세 콘서트에 갔는데 ‘비욘세가 제이지 보단 23퍼센트 정도 돈을 덜 받아야 하고, 비욘세는 투표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제이지가 공연하는 동안 같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 대신 랩하느라 힘든 제이지를 위해 스테이크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페미니스트다."
미국의 코미디언 배우인 아지즈 안사리가 데이비드 레터맨의 토크쇼에 나와 했던 말이다. 나는 이 비유가 페미니즘에 대해 정말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정확한 예라고 생각한다.
남자와 여자는 성별만 다를 뿐 같은 가치를 지닌 '사람'이다. 그들이 만약 같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같은 꿈을 위해 같은 노력을 할 수 있음이 충분한데도 그것이 성별만으로 다른 대우를 받고 다른 결과를 낳는다면 그건 명백한 차별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페미니즘이란 그 차별의 간극을 좁히고 진정한 성평등을 이룩하려는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페미니즘 투쟁을 마치 남녀라는 구분선으로 나뉜 대립 구도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싸움이 아무 의미 없는 이유는 혐오를 혐오로 대응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페미니즘은 여성 뿐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반만 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고 환영받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어요?
영국인 배우인 엠마 왓슨이 UN 연설('HeForShe' 캠페인)을 할 때 청중에게 던졌던 말이다. 엠마 왓슨은 이 연설에서 페미니즘의 왜곡된 의미에 대해 지적하고 페미니즘이 여성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양성평등을 이룩하면 결국 남성과 여성 모두가 성 고정관념에서 해방되며, 서로가 무엇이 아닌가를 따지길 그만두고 서로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간혹 여성만 페미니스트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듣는데 그것은 정말 오해다. 남성과 여성,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으며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된다고 해서 그들의 권리가 더 낮아지거나 여성보다 보장을 못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은 서로 배척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서로 상생해야 하는 존재다. 여자가 누군가의 어머니, 아내, 자매, 친구인 것처럼 남성 또한 누군가의 아버지, 남편, 형제이자 친구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관계들로 엮여있기에, 우리는 단순히 개인이 속해있는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안을 다같이 찾아야 한다. 이젠 왜곡된 페미니즘의 의미를 부여하며 여성이란 집단을 몰아가거나 다른 성별을 가진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싸우는 것은 그만둬야 한다.
나는 진심으로 카페의 남성이 던졌던 ‘저기... 페미니스트 그런 거 아니죠?’ 라는 말이 결국 ‘저기... 제 인권이랑 그쪽 인권이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죠?’ 의 의미였다는 것을 알아차리길 바란다.
나는 더 이상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속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페미니즘이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악의 존재인 것처럼 왜곡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권리만 중요시하는 사람으로 치부되는 인식도 없어졌으면 좋겠다. 앞서 언급했듯, 페미니즘이란 건 기피해야 할 것이 아닌, ‘모두’가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마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