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관계를 강요하는 연인에 대하여
“ 언니, 내가 저번 달부터 만나기 시작한 그 사람 알지. 그런데 요즘 그 사람 때문에 고민이 있어... 사실 얼마 전부터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계속해서 내게 성관계를 밀어붙이더라구. 그러다 내가 거부하면 말겠지, 내 말을 듣겠지 했는데 요즘들어서 점점 그런 행동들이 심해지고 있어. 다른 여자들은 안 그런데 왜 나만 이상하냐며 계속 비교를 하거나 성관계를 하지 않으면 헤어질거라는 식의 폭언을 하기도 하면서...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아직까진 헤어지고 싶다는 마음까진 들지 않는데, 나 어떻게 해야 좋을까?"
사실 지인에게 이런 상담을 요청받은 순간, 그녀에게 줄 명확한 답은 이미 내 머릿 속에 있었다. 나는 이전에 한 번 그녀와 똑같은 고민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스무살이 되어 처음으로 사겼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대학교 OT에서 만났던 그는 꽤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이후로 연락을 종종 주고 받았을 때 나에게만 보여주는 듯 했던 따듯한 배려심과 매력에 끌려 나는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런 꿈 같았던 시간도 잠시, 사귀기 시작한 지 첫 주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내게 성관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진한 스킨쉽을 강제로 시도하는 등의 행동들을 계속해서 보였고 그런 일이 벌어질 때 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은 사랑에서 오는 설레임이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였다. 내가 계속해서 완강하게 거부하자 끝내 그는 '내 생각보다 넌 성숙하지 못한 것 같아'라는 말과 함께 이별을 통보했다. '성숙', 아주 짧은 단어였지만 그가 내게 가졌던 어느 정도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하지만 마음이 무너져내리기도 했다.
남자들은 다 그래.
그 연애가 내게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했던 이유는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맞은 연애였고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이별의 이유였기 때문이였다. 또한 그의 말버릇과도 같았던 ‘남자들은 다 그래’ 따위의 말들을 들으며 어느샌가부터 성관계를 강요했던 그 대신, 성관계를 거부했던 내 자신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를 만나며 나는 항상 그가 내게 하던 말들을 내 자신에게 되뇌였던 것 같다. 성관계는 연애의 담보로써 내 사랑의 진실성을 증명하려면 내어줘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이성이 있어도 믿지 못하고 회의감에 빠져 있었다. 내 마음에 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도 결국 내 마음에 남은 건 ‘넌 결국 내 몸을 원하는 거겠지.' 식의 상대방에 대한 불신 뿐이였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나는 너무나 기본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이 절대 아니라 그냥 내가 만난 그 사람이 별로더라' 라는 진리. 사회에 나와서 정말 진실하고 나를 존중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니 그 때의 그사람이 했던 행동들은 모두 사랑이 아닌 그저 폭력이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지금은 딱 잘라서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 주제도 사실 그 때의 상황에서 본인의 일이 되었을 땐 참 달랐다. 모든 관계는 감정이 깃든 순간 냉정한 판단을 하기 힘들어지고 그건 나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았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제일 무서운 점이 아닌가 싶다. 내가 피해를 입고 있는 그 순간에도 나는 그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말이다. 그가 요구하는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한 사랑이라는 세뇌에 익숙해진 나는 폭력과 사랑 사이의 모호한 경계선을 지워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문제일수록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줄 수 있는 주위 사람들의 선한 도움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나는 어렵게 그 사실을 깨달았고, 그러기에 더욱 나는 그녀의 문제에 개입하기로 했다.
“ 너가 이미 내게 그 사람과 헤어지기 싫다고 말한 시점에서, 지금부터 건넬 조언이 너에겐 달갑지 않은 답임을 알지만... 나는 너가 꼭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좋겠어.
정말 한 가지 확실한 건, 성관계는 연애의 담보로 묶여 오는 게 아니야. 이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있고 그만큼 무수한 가치관을 가진 관계들이 있어. 그토록 제각각이지만 우리가 그 모든 관계들을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일컫는 이유는 서로의 가치관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것이 공통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성관계에 대한 가치관도 마찬가지야. 연인 사이에서 성관계는 필요하다/필요하지 않다는 개개인의 가치관일 수 있지. 하지만 서로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맞춰가는 것이 아닌, 한 쪽만의 가치관을 원치 않는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순간 그건 전혀 다른 문제가 되어버려.
누군가가 너의 몸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라고 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맞춰가는 노력 중 그 어떠한 것들도 아닌 그저 폭력이야. 너가 지금은 사랑이라 믿고 싶을지라도 말이야. 지금이든 나중이든 언젠가는 그 사실을 깨달을 때가 오게 될 거고, 너가 이 문제를 더 회피할수록 그 때 가서 후회하며 받을 상처는 지금 너가 헤어지면서 받는 상처보다 훨씬 클 거야.
그러니 그 사람이 바뀌지 않을 거라면 너가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는 너를 남들과 다른 이상한 사람,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 그를 '그만큼'이나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으로 정의해왔지만 사실 넌 정말 그를 있는 힘껏 사랑했다고 생각해. 이런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관계에서조차 너는 너 자신의 마음보다 그 사람의 기분을 먼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보이니까.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만큼, 너 자신 또한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 몸의 주인은 그 사람이 아닌, 너 자신이니까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