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들을 당한 사람 같지 않아요.”

피해자의 자격에 대해

by 정지은 Jean


네가 너무 밝은 사람이여서
그런 일들을 겪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대학을 다니며 수 차례 성추행을 당했던 경험을 이야기 했을 때, 그 지인이 내게 던진 첫마디였다. 물론 그의 눈빛이나 말투에선 악의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어떤 이유였을까, 그가 던진 말은 잘 견뎌냈다는 따스한 위로라기보단 이상한 거북함으로 다가왔다.


분명 그 당시엔 정말 힘들었다. 내가 어찌 손 쓸 수 없을 만큼 한 없이 무력하던 상태에서, 나의 존엄할 권리 따윈 잊혀진 채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기억들이 날 끊임없이 괴롭혔다.


중의 하나가 벽시계였다. 동창회 같은 곳에서 기념품으로 받을 법한, 그 흔해 빠진 모양의 벽시계는 그 일이 일어나던 날 밤 그 방에 걸려 있었다. 흐릿했던 의식 속에서 벽시계와 그 시곗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숫자들을 바라보며 제발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도했던 그 때의 절박함은 내 기억속에 떨쳐낼 수 없는 무언가로 자리잡았다.

트라우마. 그래, 그 정신적인 방황과 고통의 구간 반복에 이름을 붙이자면 그럴 것이다. 벽시계 트라우마라니, 왠 이딴 트라우마가 있나 싶을 정도로 웃긴 이름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그 때의 나에게만큼은 전혀 웃긴 존재일 수 없었다.


비슷한 모양의 시계를 볼 때마다, 시곗바늘이 그 때의 시간을 가리킬 때마다 고통은 다시 내 곁을 찾아왔다. 그렇게 그 날의 감각이 내 등 뒤로 몰아칠 때면 고개를 미친 듯이 휘젓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현실은 가끔 꿈에서도 이어져 한동안 그 벽시계가 걸린 방에 영원히 갇히는 듯한 느낌의 꿈을 꾸곤 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오지 않을 날은 없었다. 그렇게 힘들고 날 바닥으로 이끌었던 기억들도 시간이 지나자 찾아오는 빈도가 점점 줄었고, 조금씩 나의 일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스며들었다.

분명 내게 벌어졌던 그 일과, 그 시간을 잊진 않았다. 하지만 내 일상은 다시 사람들과 웃고 지내고 누군가와 연애도 하는, 지극히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내 가까운 가족과 지인들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이 과정을 생판 남들만 볼 글에 써 내려가는 이유는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 질문의 대답은 몇몇의 생판 남들, 그리고 내가 앞서 느낀 거북함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이 깊다.




피해자치곤 너무 잘 지내는 것 아닌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남자를 다시 만나?

사람들이랑 잘 웃고 다니던데?

.

.

.

혹시 피해자인 척하는 거 아니야?




내겐 가끔 마치 트라우마라는 것이 피해자의 자격에 부합하고 부합하지 않고를 따지는, 하나의 증거로 요구하는 생판 남들이 있었다. 내가 마치 평생을 가해자를 두려워하고 그 때의 기억에 잠식되어 폐인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그들의 기준에 있어서 '완벽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말들. 상처를 자신에게 보이지 않으면 없는 걸로 취급하겠다는 아주 저열한 오지랖이었다.



트라우마가 꼭 생겨야 돼?
사건 당한 것도 억울한데,
괴롭기까지 해야 하냐구.

내 인생 드라마인 <라이브>에서 나온 대사였다. 성폭행 피해자였던 주인공이 잘 지내는 자신이 이상한 건 아닐까라는 고민들을 털어놓자, 성범죄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는 이렇게 말했다. "매일 힘들어도, 가끔 힘들어도, 트라우마가 생겨도, 안 생겨도 다 정상적인 반응 아닐까?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반응이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그리고 주인공은 대답한다. "내 정신상태가 잘못된 게 아닌가 의심했는데, 난 그냥 잘 견딘 거네요."


나는 정말 잘 살고 싶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도, 그 일이 일어난 후에도 내 인생의 목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잘 살기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목표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내 인생의 주체는 내 자신이고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권리는 누구도 뺏어갈 수 없다.


그러니 감히, 남들도 내 인생에 대한 권리를 뺏으려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내가 남자를 다신 못 만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밤에 술을 마실 때 좀 더 '조심해야' 할 이유가 된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네가 너무 밝은 사람이여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게 믿기지 않아.


또한 이젠 피해자에게 쏟아졌던 그 말들의 방향을 바꿔 죄의식도 반성도 없이 아주 잘 살고 있는 '가해자'에게 이 말을 꼭 해줬으면 한다.


잘 살수 있는 권리를 침해당해야 할 쪽은 그 쪽이니 말이다. 이 쪽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