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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Jean Oct 17. 2017

사회생활은 사회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날 위한 것일까



부장님~ 너무 젊어보이세요!

흘끗 옆자리를 쳐다봤다. 한국에서 회사생활을 하던 시절, 내게 이런 풍경은 익숙했다. 상사의 화장이나 새로 산 옷에 대해, 혹은 성격이나 돈 씀씀이, 그리고 점심 메뉴를 고르는 센스를 칭찬하기까지. 상급자만 보면 칭찬 머신이 되곤 하는 사내 분위기는 내게 무언가의 위화감을 종종 안기곤 했다. 하급자에게는 엄하고 상급자에겐 관대함의 아이콘이었던 그들을 보며 이런 것들이 과연 사회생활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딸랑딸랑.


그런 사회생활에 난 항상 의문이 들었다. 저 사람들의 칭찬은 진심인걸까? 상사는 저 칭찬을 듣고 기쁜걸까? 진심으로 우러나지 않는 칭찬에 의미가 있을까? 과연 이런 '사회생활'이 사회에서 살아나가는 것에 진정으로 도움이 될까?



사회생활은 사회를 위한 생활이 아니었다.


사회초년생이던 내게 누군가가 말했다. 상사를 기분 좋게 만드는 건 상사를 위해서가 아닌 너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상급자의 이쁨을 받고 미래에 좀 더 편하기 위해서. 마치 마일리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지금 티끌같이 적립해서 미래에 한방에 돌려받는 마일리지. 이 말을 듣자, 마치 사회생활이란 말 자체가 잘못된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그런 면에선 사회생활도 신조어나 다름 없다. 사회 생활이 아니라 사회(에서 살아나가기 위한 나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줄여도 너무 줄였다.





저는 달라서, 그래서 틀린 사람인가요?


나는 할 말, 안할 말을 명확히 구분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할 말은 하고, 안할 말은 안해버려서 상사의 심기의 거스를 때가 종종 있었다. 25년을 이렇게 살아온 내가 회사에 들어간다고 해서 손바닥 뒤집듯 바뀌진 않을 거라 솔직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칭찬에 박하진 않지만 솔직했던 나는 항상 '사회생활에 글러먹은 사람'으로 찍히기 일쑤였다. 그들이 일컫던 '사회'에서의 내 위치는 부적응자, 즉 낙오자로 치부되었다.


ㅇㅇ 씨는 사교성이 좀 부족한 것 같아요.

한번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싹싹하게' 하지 못해 상사의 심기를 거스른 날이였다. 내가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란다. 물론 맨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내가 잘못된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데 나만 이 곳에 속하지 않는 걸까. 나만 여기서 모난 돌인걸까. 내가 이러려고 취업을 했나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이 말에 대한 상처가 무뎌졌던 이유는, 은근 주위의 많은 이들이 겪는 레퍼토리였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땐 누구 하나 사회성 없다곤 들은 적이 없던 사람들이 회사만 들어가면 이런 소리를 듣고있는 것이다. 그들이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다 일컫어진 공통점은 하나 밖에 없었다. 그저 그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 그래서 그들에겐 틀린 사람들이라는 꼬리표가 붙여졌다.


나 또한 내 자신을 바꿔보려 많은 노력을 했다. 남들처럼 말도 안되는 칭찬도 해보고, 싹싹하게 굴어도 보고, 내가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나 싶을 정도의 얼굴도 연습했다. 하지만 결국 그건 단지 사회에서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갈 수 있는 길일 뿐, 사회에서 더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아니였다. 


내게 사회생활이란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의 기준에 소비되어야 하는 것이였다. 그들에게 나를 맞춰야만, 그리고 그런 사회생활을 잘해야만 철이 들고 내 앞가림을 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 사회에서 난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떠나기로.

떠나기로 마음 먹은 건 단순한 계기였다. 어느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려고 일어났는데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지쳐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내 자신으로써 있음이 용납되지 않는 하루 하루가 내겐 너무 버거웠던 건지도, 혹은 내 자신이 제일 먼저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점점 사회생활은 사회를 위한 것도, 날 위한 것도 아니게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품이 아니기에 모두가 다른 패턴, 다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내가 회사를 다니며 하고 있는 일은 그저, 내가 싫어하던 그들과 똑같은 모양의 어른으로 내 자신을 다듬고 있던 것 뿐이였다. 그래서 결심했다. 차라리 그들이 말하는 것 처럼 내가 사회생활을 못하는 거라면, 만약 내가 여기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적응하지 못하면 버려질 큰 기계 안의 그저 단순한 부품이라면, 딱 그정도가 내게 매겨진 가치라면 난 이 사회를 떠나야겠다고.



출근 길,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


'그' 사회에서 '이' 사회로.


사회생활에 치였던 그 회사에서의 퇴사를 결심하고 난 후, 모든 이직 과정은 바람을 단 배처럼 미끄러지듯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 지금은 영국으로 와서 두번째 이직을 성공하고 아주 좋은 근로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여기서는 더 이상 알맹이 없는 칭찬이나 예의, 대우 같은 것은 없다. 칭찬 혹은 비판은 내가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안해도 상관없다.


물론 아부를 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겠지만 적어도 신입이라고 수저를 놓거나 물을 세팅하거나 하는 일을 똑바로 하지 않아 구박받는 일은 없다. 구전동화마냥 내려오던 외국의 프리한 근로환경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복지와 사내문화가 갖춰져 있었고, 무엇보다도 모든 사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날 놀랍게 했다. 더 이상 '사회생활'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게 한국과 영국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은 이유는 한국에서도 이런 분위기의 회사는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더 나은 근로환경을 보유하고 있을 확률이 한국보단 영국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느냐 마느냐는 영국과 한국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 The Last Word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


언젠가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싶은 말' (The Last Word) 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중에서 해리엇(셜리 맥클레인)이 앤(아만다 프리사이드)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Never apologize for speaking your mind"
너의 의견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절대 미안해하지마.

영화 The Last Word 중에서


이 장면을 보고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물론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은 아니였지만, 내 자신을 회사라는 큰 틀에 맞추고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솔직해지지 못했던 나를, 마치 다독이는 듯했다.


한 때는 사회생활을 못하는 내 자신이, 사회의 입맛에 맞출 수 없는 내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더 이상의 사회생활은 필요하지 않다. 그 대신, 진정한 내 자신이 필요로 여겨지는 사회를 내가 나서서 찾기로 결심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믿음이였다.


"모든 사람들은 어딘가 필요로 여겨지는 사회가 있다. 지금의 사회생활에 회의감을 느껴도 그건 단지 '이' 사회의 이야기일 뿐이다. 나를 기다리는 '그' 사회는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


나는 지금 이 믿음을 잃지 않았기에 안다. 특별하게 나를 맞추려는 노력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분명, 그 사회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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