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서 자식 둘을 건사하셨다. 사실 아버지가 계실 때도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다.
거짓말이다.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던 수준이 아니라, 빈곤의 끝을 봤다. 중산층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살아오다가 imf의 직격타를 맞았다. 너절하게 나열하기도 싫은 아주 지옥 같은 날들이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빈곤에서 탈출하나 했는데 내 급여로는 어림도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미스트 뿌리기였다. 그래도 매월 항아리를 촉촉하게 적셔주는 급여가 있었고, 미스트도 쌓이니 물방울이 되었고, 찰랑찰랑 쌓이기도 했다. 빈곤하고 초라했던 소녀가 제 밥벌이는 하는 중년이 된 것만으로도 부끄러울 일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건 진짜다.
imf로 사업의 위험성을 체득한 나는 본능적으로 안전한 직업을 선택했고, 투자보다는 차곡차곡 쌓아두는 편을 선택했다. 큰돈을 잃지도 않았지만, 큰돈을 모으지도 못했다. 철저히 안정지향형 인생이었다.
거짓말이다.
딱히 안정을 지향한 적은 없으며, 그저 귀찮다고 방치하다 보니 오늘에 이른 것뿐이다. 자산 0원에서 시작한 직장생활 18년 차의 현실은 서울의 작은 빌라 전세보증금이 전부인 셈이다.
그래도 그것만이 내 자산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악착같이 모으지 않았을 뿐, 내 시간을 재테크에 쏟지 않았을 뿐, 나는 나름대로 충실히 내 삶에 투자해 왔다.
이것도 진짜다.
취업을 하고 코로나로 세상문이 닫히기 전까지 나는 매년 해외여행을 갔다. 대단한 결심을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많을 때는 1년에 네 번도 나갔던 적이 있었다. 무언가를 얻고자, 배우고자 한 건 아닌데 결과적으로는 많은 걸 얻었고 많은 걸 배웠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배웠고, 그로 인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이전보다 좀 더 너그러워졌다.
그리고 본업으로 아주 바쁜 시기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책을 읽었다. 책 속에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었고, 그럴수록 겸손해졌다. 내 소양, 지식, 자기애 따위가 얼마나 하잘 것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거울 같은 책 앞에서 거만해지기란 쉽지 않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아직 부족하다.
여전히 나는 더 너그러워져야 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그렇기에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열심히 여행을 가고 책을 읽을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공격적인 투자임과 동시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안전 자산이기 때문이다.
가끔 두통이 심해질 때마다 생각한다. 혹시 인지기능에 장애가 생기면 어떡하지. 그렇다면 과연 여행과 독서로 얻은 직간접 경험과 소회는 안전자산이 맞는 걸까. 하지만 (생각하기도 싫지만) 정말 인지기능에 장애가 온다면 눈에 보이는 재화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차라리 안전자산에 하나 더 추가하는 게 낫겠다. 운동 말이다. 여행과 독서로 얻은 정서적 자산을 지키고 병원비로 탕진할지도 모를 물질적 자산을 지키기 위해서 해두는 운동이야 말로 찐 안전자산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