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티머스에 대한 마르크스적 시선
마르크스 경제학은 비주류 학문으로 취급되고 있음에도, 경제적 구조에서 발원하는 다양한 사회 현상에 대하여 여전히 매우 강력한 설득력 있는 내용을 여럿 포함하고 있다. 물론 경제 현상이나 사회 현상을 마르크스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문제적일 수 있겠으나,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설득력을 갖춘 문제들을 도외시하는 것 역시 부당할 것이다.
그 중 지금은 "노동가치론(잉여가치론)"만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가의 이윤은 노동자가 생산하는 잉여가치로부터 나오며,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지불할 임금의 규모를 줄이거나 생산 설비(고정 자본)를 혁신하여 숙련 노동 의존도를 줄임으로써 그 이윤을 착취할 것이고, '이윤율 경향적 저하 법칙(수확 체감의 법칙)'을 해소하려 들 것이다.
그렇게 탈숙련화된 이들은 최종적으로 '산업 예비군(보편 노동자 신세)'로 전락하여, 이른 바(요즘 말로하면), '긱-경제(gig-economy)'에 종속될 것인데, (이들의 생계와 소득의 불안정성과 규모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제도나 새로운 직군이 충분히 빠르게 상쇄하지 못한다면)* 주변부와 생존자들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현대판 산업 예비군'의 진정한 문제점은 이러한 보편 노동 인력 풀에 속한 개인들의 협상력 결여에 있다. 이들이 생존을 위해 새로운 플랫폼 노동에 뛰어 들게 되었을 때, 이들의 노동 상품은 언제고 대체 가능한 일회용 공산품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 마르크스의 의견 이상의, 오늘 날의 여러 '사회보장제도'와 기술 진보로 인한 '낙수 효과'나 '직업 재편'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작업은 잉여가치가 인간 노동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주류 경제학이 곱게 보지 못할) 한계를 지니지만, 오히려 그 요체인 '고정 자본'의 감가 상각 주기, '노동 상품'의 즉각적 소모 주기, 이로 인한 노동자 생계의 임금 종속성 등을 생각했을 때, 비로소 이러한 방식의 기업 성장 패러다임이 야기할 위력적인 부작용 시나리오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설령 잉여가치가 인간 노동으로부터만 나오지는 않는다고 생각해 보더라도, 경제 현상에서 노동 소득과 소비가 철저히 유리될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단코 이런 취지로 머스크 자신이 '화폐무용론'*을 운운하는 것이다.
* https://youtu.be/Rni7Fz7208c?si=hxNCzzDAao-HbQKm | 영상에서 머스크는 기술이 노동을 대체하더라도 그 낙수 효과가 '보편적 고소득'을 가능케 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비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발언들은 결국 영상 후반부에서 말하는 기존의 화폐 시스템이 데이터-에너지 관계로 전환될 것이라는 주장(비트코인 등)의 포석으로 보인다.
이미 이러한 방식으로 기업의 장부가치를 개선하고 더 큰 시장을 창출하기까지 하는 전략은 점점 여러 빅-테크가 그리는 미래의 매우 큰 부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테슬라는 전 세계적으로 125,665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2024년 말 기준). 우리의 계산에 따르면, 10%를 휴머노이드로 대체하는 것은 (휴머노이드당 약 20만 달러 순현재가치로) 약 25억 달러의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_모건 스탠리의 아담 조나스*
* https://kr.investing.com/news/stock-market-news/article-1540927?utm_source=chatgpt.com
인공 신경망 연구(연결주의 모형)의 선구자였던 제프리 힌튼 역시, 한 인터뷰에서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생각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 https://youtu.be/giT0ytynSqg?si=dWdt4dby9w19UAKj
형세를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 보아도, 여러 빅-테크 CEO들이 천편일률적으로 '기본소득'을 언급하는 것은 대단히 해학적인 모양새이다. 아무리 경제 현상을 개인들이 결정할 수 없다고 한들, 매우 강력한 시장 결정력을 지닌 기업들이 자국과 자기 법인의 이익을 위해 국제적인 규모의 경제 현상을 몸소 야기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대응과 생존은 각자의 몫으로 환원하는 꼬락서니이니 말이다. 마치 불 지른 놈이 어서 네가 사는 방에 불길이 도착하기 전에 소화기를 구비해 두라고 조언하는 격이다.
불평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강요 받은 생존 전략도 부저런히 강구해야 하기로서니, 이러한 방식의 구조 변동을 마냥 달갑게만 보는 것 역시 편중된 시각일 것이다.
물론 이 파고 속에서 정말 좋은 방식의 새로움이 나타날 수도 있다. 생활 편의가 증진되거나 신규 직종이 형성되는 등 말이다.
하기야 마르크스도 (비록 역사 속에서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산업 혁명 같은 생산력 폭주를 '공산주의 혁명'의 필요조건으로 내세웠던 장본인이었고, 그의 저작를 주요하게 참고했던 마르쿠제 같은 비판 이론가도 생산 혁신이 장차 노동을 '생존'이 아닌, '놀이'로 접근하게 해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 대체 노동력으로 인한 산업 예비군 계층은 새로운 생태계에 각양의 방식으로 잘 적응하게 될 수도 있다. 적자 생존에 의한 자연 선택의 논리대로 말이다.
* 마르쿠제의 견해는 부분적으로 일론 머스크의 견해와 유사하다.
그래서일 것이다. 너도나도 대체되지 않기 위한 고민에게 가슴 한 켠을 내어주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위기 의식은 이제 거의 교양인의 염려로 부상해 간다.
우리는 쓰나미를 마주하고 있다.
거대한 인공 파도 말이다.
그저 이 쓰나미에 설계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매우 꺼림직해 하며,
그들이 위대한 인물들이라는 사실과 그들에 대한 반응이 양극적이라는 점에 몸서리칠 따름이다.
자본은 인공지능보다 먼저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자율화된 무엇이며, 자본을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는 인간의 욕구를 그것에 효과적으로 종속시켜 왔다.* 그리고 이 자율 기계는 인류의 직접적인 자녀가 아닌, 자본이라는 대리모의 자녀다.
* 여기서 통화 정책의 효용을 논하는 것은 코미디일 것이다. 병목을 움켜 쥔다고 그것이 토해내는 악취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자율 기계에 의한 역지배를 미리 두려워 하는 마음은, 이미 각자가 당하고 있을 현재의 역지배를 다소 효과적으로 은폐하고 있는 듯하다.
여러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으며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이야, 막연한 적개심이나 공포감만으로, 혹은 순진한 투기심이나 기대감만으로 천년 왕국의 도래를 기다리는 신도들보다는 생산적일 수 있다.
그러나 각자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순전히 각자의 몫일 뿐이다.
우리가 "우리로서" 무엇을 해야 할 지의 논의는 과연 충분한가?
이러한 논의에 대중은 과연 얼마나 진지한 태도로 관심을 경주하고 있을까?
태만적인 무관심과 피상성, 배타적 소통 등은 위기 앞에서 가장 경계 해야할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환경은 점점 개인의 차원에서 이를 극복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