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해석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토마스 쿤 과학철학
※ 재미로 쓰는 글이므로 강조를 제외한 인용출처는 과감히 생략한다. 물론 여기서 내 고유한 생각은 해석학 이론을 통해 쿤을 디코딩하는 방식 뿐이다.
서론
토마스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 간 “공약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은 절대적 이해 불가능성과 같은 단정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비교 가능성을 열어두는 개념이다. 여기서 비교 가능성은 두 개의 안경을 동시에 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차례대로 안경을 바꿔쓰는 일은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이 글에서는 “공약 불가능성”은 거시적 규모의 과학혁명 시에 해당하는 급진적인 경우만을 다룬다. 내 마음이다.
이는 그가 “아리스토텔레스 경험”이라고 칭했던 해석학적 경험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형이하학)』 속 “말 안 되는 진술들(이해 안 되는 진술들)”이 말 되게 하는 독해법(“쿤식 사료 읽기”)을 체득한 뒤에도 현대 과학의 상식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대화하기 위해 애써 흐릿한 안경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한 뒤, 다시 그 안경을 벗고 뚜렷한 현대인의 안경으로 갈아 쓸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가다머식으로 말하면, 현재 지평과 과거 지평의 차이를 인식하고 과거 지평에 접속하는 “지평 융합(Horizontverschmelzung)”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조금 이상하다. 가다머에 의하면, 현재 지평에 속한 독자가 과거 지평 속에서 쓰인 글을 읽을 때 발생하는 지평 융합은 ‘새로운 방식의 반복’ 즉, 과거 저자와 현재 독자가 서로 대화 나누지 않았다면 결코 떠올릴 수 없었을, ‘새롭게 읽히는 과거’와 ‘새롭게 읽히는 현재’를 산출해야 한다.* 하지만 쿤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 경험”과 “쿤식 사료 읽기”는 과거라는 새 안경을 쿤에게 주었을 뿐, 그의 현대적인 과학 지식에는 새 내용을 더해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쿤식 사료 읽기”는 “진정한 대화 속에 승자는 없다.”*라는 가다머식 해석 이론이 빗나간 사례일까? 혹 그래서 가다머는 자기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쿤이 과거 문헌을 잘못 읽었다고 말해야 할까? 즉 이 질문은 쿤의 용어를 빌려 이렇게 다시 표현될 수 있다. “왜 쿤식 사료 읽기는 쿤에게 ‘제3, 제4의 패러다임’ 같은 무언가를 남겨주지 못했을까?”
* 예컨대, 사도 바울과 장로 요한이 로마 제국의 언어로 초기 유대-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번역했을 때, 도착어로 쓰인 신앙은 출발어로서 이해된 신앙과는 다른 무엇인가였고, 교부들이 영지주의나 그리스 철학과 대결하기 위해 사도들의 저술을 상대 진영의 언어로 번역한 결과물 역시 사도들의 취지와는 색다른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 ‘지평 융합의 독해는 독자의 지평에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는 가다머의 해석 이론의 중요한 논지다.
1. 패러다임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우선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쿤의 패러다임 개념이 사적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패러다임은 개별 독자들만의 고유한 “전이해(Vorverstandnis)”가 아닌, 과학 공동체에 속한 전문가 집단 공공의 개념이다. 그래서 쿤이라는 개별 독자의 독해로 인해 무언가 독창적인 견해가 산출된다고 해도 그것이 즉시 패러다임의 변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는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지평 개념에도 해당하는 바이다. 해석학에서 말하는 지평의 개념 역시 개인의 사고에 지배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하는 역사적 힘, 즉 “영향사(Wirkungsgeschichte)”를 뜻한다. 차이가 있다면, 쿤의 패러다임 개념과는 달리,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지평 개념은 특정 집단에게 통용되는 개념이라기보다 폭 넓은 시대적 영향을 지목하는 말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시기처럼 과학자 집단의 대중들에 대한 지적 권위가 충분하고, 그래서 한 패러다임이 대중적인 상식에 대해 발휘하는 구성적 영향력이 매우 강하다면, 비로소 쿤의 패러다임과 해석학적 지평의 의미론적 간극이 한 폭 좁아지게 될 것이다.
즉, 만약 쿤에게 일어난 어떤 생각의 변화 때문에 그와 연구 분야 및 기본 취지를 공유하는 다른 연구자들(그런 사람들이 있다면)에게도 비슷한 반향을 일으킨다면, 그래서 쿤의 작업이 일종의 “모범 사례(examplar)”가 되어 모종의 지배적 생각과 실천이 부상하고, 더 나아가 비전문가 대중들의 상식에 역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평”과 “패러다임”의 거리가 좁아진다고 하여도 쿤에게 일어났을(일어났다면) “지평 융합”과 “패러다임의 변화”의 거리까지 그만큼 대칭적으로 좁아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평”과 “패러다임”은 사회적이지만, “지평 융합”은 “패러다임 전환”과는 달리 개인적인 사건으로서 선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서 제기한 문제의식처럼, 지평 융합이 생산하는 의미론적 잉여가치가 “쿤식 사료 읽기”에서 직접적으로 관측되지 않는 이유는 패러다임과 지평의 개념적 차이보다는 “지평 융합”의 개별성을 생각했을 때 비로소 명료해진다. 상호주관적으로 승인되어야 하는 패러다임과 달리, 지평 융합은 늘 거대한 전통에 대한 반성적인 승인이나 이의 제기를 통해 구현될 수 있는 개별적인 사건이다.
2. 패러다임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지평 융합”의 개념이 개별적인 독해 사건에 먼저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은 하이데거 이전의 해석학이 기본적으로 문헌 연구의 ‘기술’ 혹은 ‘방법’에 대한 연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물론 방법론으로서의 해석학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전환’과 가다머의 ‘전통 및 권위에 대한 메타-윤리적 확장’을 거쳤더라도, “지평 융합”이 개인사적 독해 사건에서 출발하는 과정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가다머의 지평 융합이 쿤식 사료 읽기 과정에서 정말 발생했다면, 그래서 가다머가 지평 “융합”이라는 말을 통해 뜻하는 바가 쿤의 정신세계 안에서 발생했다면, 도대체 그러한 정신적 지각 변동은 어떻게 확인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내 생각은 ‘쿤의 지평 융합’ 결과는, 과거 패러다임과 현재 패러다임의 혼종적 융합이라기보다, “쿤의 과학철학” 그 자체라는 것이다. 즉 『과학혁명의 구조』, 『본질적 긴장』, 『구조 이후의 여정』 등에서 드러나는 쿤의 입체적인 과학관 그 자체가 쿤의 지평 융합이 생산한 ‘의미론적 잉여가치’이다.
가. 우선 쿤은 아리스토텔레스 경험과 쿤식 사료 읽기를 통해 “새로운 과거 안경”을 획득하였다.
즉, 쿤에게 지평 융합이 틀림없이 발생했다는 정황 증거는, 쿤이 어느 시점부터 현대인의 시각으로 뉴턴, 데카르트, 아리스토텔레스 등 과거 문헌에 대한 시대착오적 독해를 점차 줄여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 결과 탄생한 “쿤식 사료 읽기”라는 ‘쿤식 해석학’은 쿤이 과거 문헌에 대하여 필요한 만큼 ‘복원적 읽기’를 시도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를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패러다임의 “비교”, 즉 ‘안경 갈아 끼우기’를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실천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 그 정도는 “최소한”의 수준부터 “최대한” 혹은 “최선의” 수준까지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적 완성도의 근사성은 해석 이론에서, 특히 지평 융합의 개념에서 ‘별도의 중요성’(내가 의미론적 잉여가치라고 부르고, 데리다가 해체가 엄밀한 독해의 귀결이라는 생각을 통해 의미하는 그것)을 갖는다.
나. 또한 쿤은 현대 과학 공동체의 과학 교육 및 연구 활동에 대한, 즉 “새로운 현재 안경”을 획득하였다.
쿤 이전에 편만했던 과학관에 대해 생각하면, 압축적 생략적 교과서 편집 방식 때문에 이를 읽는 학생들은 과학적 진보가 큰 걸음으로 척척 약진해 왔다는 신화적인 인상을 학습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쿤은 이러한 교과서 저술 방식에도, 빠른 기본기 학습 이후 당면한 문제 풀이에 집중하도록 돕는 장점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이 방식이 실제 과학 역사가 이루어진 비선형적 비정형적 실태에 관해서는 눈가리개로 작용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도 엄연한 진실이었다. (쿤 자신의 “아리스토텔레스 경험” 자체도 이러한 작용을 방증하는 사례이다.) 그러나 쿤의 과학사 연구와 과학철학 작업은 이러한 과학관이 신화적인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이는 분명 쿤의 현재 지평 안에 일어난 새 물결이다. 즉 “쿤식 사료 읽기”가 가다머가 “지평 융합”을 통해 시사한 양방향의 변화(“새롭게 읽히는 과거와 새롭게 읽히는 현재”) 중 전자에 해당한다면, 쿤의 “구조”는 여기서 후자에 해당한다.
3. 토마스 쿤 과학철학의 ‘실천지’로서의 가능성
만약 내 해석이 타당하다면, 그래서 토마스 쿤의 과학사 연구 과정에서 “지평 융합”이 발생했고 그것이 그의 과학철학을 낳았다는 ‘적극적 관점의 해석학적 순환’이 타당하다면,* 여기에는 생각해 볼만한 함의가 조금 더 남아있다. 그것은 토마스 쿤 과학철학의 “실천지(φρονησις)”로서의 전유 가능성이다.
* 나는 해석학적 순환을 ‘소극적 관점’과 ‘적극적 관점’으로 나누어 이해한다. 내게 두 구분은 해석자가 “영향사”의 지배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점에서의 소극적 의미와 그럼에도 “지평 융합”의 결과로 새로운 이해가 도출된다는 점에서의 적극적 의미에 대한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철학적 해석학에 대한 나의 해석이다.
해석학은 그 뿌리에서부터 “실천(πραξις)”을 염두에 둔 “기술(τεχνη)”이었고, 반복적인 모방 이상의 상황적인 지식이라는 점에서 테크네를 넘어선 프로네시스의 전통이다. 이것이 종교적 전통에서 전유되어 이교도의 회심이나 신앙인의 회개를 유도하는 것이든, 개인이나 집단이 역사적 이해를 통해 새로운 실천을 생산하는 것이든, 해석학은 문헌 연구 방법론에 머무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 거부는 본질적인 성격의 거부이다. 왜냐하면 해석학 자체가 궁극적으로는 구체적인 상황 속 행동으로 드러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해석학의 실천적인 성격은 하이데거/가다머 해석학의 변주인 데리다의 “독해 원리”와 “해체” 개념을 생각했을 때 명료해진다.* 데리다의 철학은 그가 ‘예비 시험’을 대비하는 ENS 학생들에게 가르친 독해법에서 발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그가 가르친 “독해 원리”에 의하면 학생들은 ‘행간에 숨은 뜻’, ‘저자의 한계나 모순’, ‘무의식적 암시적 전제’ 등을 발견할 정도로 지독하게 엄밀한 독해를 체득해야 했다. 여기서 그의 양방향 독해, 즉 “1차 독해(복원적 재생산적 독해)”와 “2차 독해(생산적 창조적 독해)”가 발전했다.* 데리다의 유명한 “해체” 개념은 이 양방향 독해 중, 후자를 실천적으로 확장하는데, 이는 하이데거의 ‘본래성과 근원성을 향한 회귀’, 이를 통한 ‘비본래적 일상성의 파괴(Dekonstruktion)’를, 그리고 가다머의 ‘제대로 된 이해’는 ‘과거 지평과 현재 지평 모두를 새롭게’ 한다는 “지평 융합” 개념을 재해석하여, ‘전통적인 규범에 대한 생산적인 파괴/장난치기’로 확장한 것이다.
* 데리다는 “해석학”, “해석” 등의 용어를 기피하지만, 데리다 자신을 제외하면 그의 작업이 해석학과 무관하다고 여기는 해석학 연구자는 극히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 역시 해석학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저술에서 데리다가 언급되지 않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게다가 카푸토의 경우처럼, 아예 데리다와 니체를 통해 해석학 전통을 다시 읽어내는 사례도 있다.
* 데리다에게 전자와 후자의 관계는 전건과 후건의 관계이기도 하다.
가. 과학자들이 봉착하는 아포리아 상황
데리다는 ’89년 카르도조 법대의 법학 교수들 앞에서 펼친 “정의는 해체이다.”라는 제목의 강연과 ’93년 빌리노바 대학교 철학 Ph.D 과정 신설 행사 도중의 ‘원탁 토론’, 두 차례에 걸쳐 해체 개념을 ‘아포리아’ 상황에 적용하였는데, 이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① 법률이나 제도적인 규칙들이 있더라도 개별 상황의 특수성이 규칙들을 “가사 상태(suspended animation)”*에 빠뜨리게 한다. ② 규칙 해석과 특수한 개별 상황 해석 사이에서 해석자는 결정 불가능한 “시련(ordeal)”*에 처한다. ③ 그러나 사안의 시급성은 해석자가 규칙 해석과 상황 해석 사이에서 “가설적 명령(hypothetical imperative)”을* 무한히 생산하며 정당화하도록 충분히 기다려주지 않는다.*
* 피론, 데카르트, 후설 등에게 소급되는 “판단 유보(에포케)”와 연관된다.
* 키르케고어가 창세기의 ‘아브라함-이삭 시험’을 해석할 때 사용한 용어와 연관된다.
* 칸트의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의 대립항.
* 하버마스가 “뮌히하우젠의 트릴레마(①무한한 논증의 후퇴, ②논증의 중단, ③순환논증 등)”를 피아제의 인지 구조를 원용해 완충했다는 방식과 비교하면 매우 흥미로울 것 같다.
또 데리다는 법률이 포섭하지 못하는 개별 사례 앞에서 조항을 축자적으로 적용하는 편과, 법률의 취지와 상황의 특수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타협하며 법 문자의 외연을 범하는 편, 둘 중 어느 쪽이 더 정의에 가까운지를 되물었다.* 비록 제도나 법률가 그 근간이 되는 이념을 철저히 구현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러한 이념들을 위해 제도와 규칙들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라면, 권한을 지닌 해석자들은 더 중요한 이념이 상황에 가 닿도록 축자적 재현 이상의 것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 데리다는 ‘아이히만 재판’에도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데리다식 해체/장난치기는 해석학의 ‘실천지’로서의 성격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내가 이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지평 융합”의 획기적 사례로 생각되는 토마스 쿤 과학철학 역시, 이러한 아포리아적 프로네시스를 함유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이 과학 기술의 사회적 확산을 고려하기도 전에, 바삐 인식적 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도 말이다. 바로 “변칙 사례(anomaly)”가 범람하고 다수의 패러다임이 경쟁하며 각 패러다임의 이론적 설명 폭이 대칭적인 경우, 즉 “결정 불가능한 상황”에 봉착하는 경우에 대한 것이다.
둘 이상의 퍼즐 풀이가 서로 비견될 만한 수준으로 아다리(?)를 잘 맞추고 있으며, 서로 다른 그림을 ‘말 되는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는 상황에서, 여러 안경을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유능한 과학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처한다. 말하자면 기존의 패러다임에 헌신할 지 새 이론을 고려해야 할 지의 시련이다.* 쿤이 제기한 “공약 불가능성”은 두 경우가 동등하게 합리적이고 동등하게 위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 이 지점에서 쿤의 “공약 불가능성”이 포퍼의 “반증주의(falsificationism)”와 라카토스의 반증주의 세련화 작업(?)과 만난다.
시간이 흘러 기존 패러다임이 주류적 학설로 굳어질 경우, “변심(conversion)”은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나고 커리어와 명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힐 수 있다. 반대로 신흥 패러다임이 기존의 것을 밀어내고 패권을 찬탈하는 경우에는 ‘충성(loyalty)’이 어리석은 선택으로 드러날 것이다. 즉 아인슈타인이 양자 불확정성 앞에서 강한 인과적 결정론을 방어한 시도가 어리석은지 현명한지, 사카구치 시몬*이 T-Reg 세포 연구에 집착했던 것이 매몰 비용에 대한 방어 기제 때문이었는지 영웅적인 확신과 뚝심 때문이었는지, 선택의 기로에 처해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이르러서야 날개를 펼친다.”*라는 말이 과학자들의 아포리아에 관하여도 매우 적절해 보인다. 보수적인 선택도, 과감한 선택도, 고도의 용기와 통찰력을 요구한다.
* 면역학의 대가. 2025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중 1인. 나는 그의 사례가 라카토스 긴 시계열의 판단을 제안하는 “연구 프로그램” 아이디어가 얼마나 적절한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 헤겔 『법철학 강요』의 경구.
나. 쿤식 사료 읽기 ‘뒤집어 읽기’
쿤의 “아리스토텔레스 경험”으로부터 “쿤식 사료 읽기”로의 이행 과정이 과학혁명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확인하는 작업이라면, 이 과정을 정방향으로 뒤집어 읽는 일은 과학혁명의 구조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업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쿤이 과거 저술 속 ‘뜬금없는 말들’을 이해하기 위해 현대적 상식을 내려놓는 어려운 요청에 응해야 했듯, 과학혁명의 주역들도 당대의 지배적 공리들을 의심하는 지난한 도전에 응해야 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뉴턴은 “데카르트적 의심”을 다시 데카르트식 “가설 세우기”에 겨누어야 했으며, 아인슈타인은 절대적 공간과 절대적 시간이라는 무시무시할 만큼 자명해 보이는 관념들을 해체해야 했다.
그러나 “쿤의 지평 융합”이 쿤의 과거 읽기와 현재 읽기를 모두 바꾼 방식처럼, 이러한 과학혁명 기의 “패러다임 전환”도* Creatio ex nihilo는 아니었다. 뉴턴에게는 ‘천체의 타원 운동’, ‘데카르트 좌표계’, ‘낙하 운동에 관한 실험 결과(중력 가속도)’, ‘역제곱 법칙의 단서’ 등이 알려져 있었으며, 아인슈타인에게도 ‘비유클리드 기하학’, ‘마흐식 회의주의’, ‘멕스웰 방정식’, ‘로렌츠 힘을 둘러싼 미심쩍은 최선의 해명’, ‘특허국의 시간 동기화 문제’ 등 다양한 맥락적 재료들이 있었다.
* 다시 강조하지만, 이 글에서는 주로 “거시적 규모의 과학혁명”을 떠올리며 말한다.
게다가 뉴턴과 아인슈타인에 의해 새 패러다임이 정착된 이후에도(“쿤 손실[Kuhn-Loss]”을 차치한다면), 과학 공동체는 기존 패러다임으로부터 계승한 많은 문제 풀이 목록을 연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곡선 운동을 기술하는 방식’, ‘삼각법을 통해 먼 거리에 있는 천체와 그 궤도의 규모를 추산하는 방식’ 등은 뉴턴 역학 이전에도 있었고 뉴턴 역학 이후에(특히 미적분학 이후에) 더 잘하게 된 주요한 작업이었으며, ‘중력 상수’, ‘수학적 모형과 실험 관측의 변증법적 활용’ 등의 특징은 뉴턴 이전부터 아인슈타인 이후의 물리학 역사 속 근본적인 연속성으로 식별된다. 요컨대 “과학혁명”도, “쿤식 사료 읽기”도 “지평 융합”이 그러하듯, 당연한 것들 속에서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일깨워내는 과정인 것이다.
실제 연구자들도 패러다임이라는 제도적 전통에 속해 있지만, 종종 쉽게 풀리지 않는 구체적인 변칙 사례들이 쌓이면, 쿤처럼 “아리스토텔레스 경험”과 유사한 것을 “패러다임의 위기” 이전에 선구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현재 지평에 걸어 보든, 모험을 감행해 보든, 공평하게 합리적이고, 용감하며, 위험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스러운 딜레마 뒤에 남게 되는 것은 어찌 됐든 인류 공공의 유산이며 새것인 동시에, 새로운 방식으로, 근원적일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해석 이론과 적용 기술로서의 해석학과 토마스 쿤 과학철학의 접점에 관하여 고민하며 그것을 유치하게나마 구체화하며 정리해 보았다. 이 작업의 취지는 가다머와 데리다의 관점에서 토마스 쿤을 이해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토마스 쿤을 통해 가다머와 데리다를 다시 이해하게 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시도 자체 일례의 “지평 융합” 시도인즉, 만약 이 작업이 잘 되었다면(내 현재 수준의 미천함이라는 변수는 제외하고서라도), 앞으로 지금 뿌린 이 성찰의 씨앗이 해석학만의 관심사나 과학철학만의 관심사만으로는 없었을 새로운 생산적 고민으로 발전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해 불가능한 것들과의 부단한 대화”
“자명한 것들을 의심하고 비상식적인 가능성을 상상할 용기”
“위험한 도전도 기꺼이 감수할 결심”
“진리와 책임의 대화”
어느 한 시점에 이 광막한 바다에 겁 없이 뛰어들었던,
모든 퍼스트 펭귄의 위대한 방황을 응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