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기계와 인간의 재개념화

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 연속성과 불연속성

by 임지성의 생각



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


한양대 이상욱 교수님의 논문 세 편을 읽고 든 생각이다.


[1] 이상욱. "인공지능의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가능성: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 철학연구 125 (2019): 259-279.

[2] 이상욱. "인공지능의 한계와 일반화된 지능의 가능성: 포스트 휴머니즘적 맥락." 과학철학 12.1 (2009): 49-69.

[3] 이상욱. "자극에 반응하고 조절되는 인간: 행동과학과 인간공학의 인간관." 인간연구 31 (2016): 7-35.


위 세 편의 논문은 공통적으로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 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의 맥락 유비적 특징을 조명하되, 근대적 인간관과 탈근대적 인간관에 더욱 초점을 두며 이를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측면에서 조명해준다.[1], [2], [3].


필자는 근대적 인간관에 관하여 뉴턴-칸트 대에서 절정에 이르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영향을 강조한다. 당대에 등장한 "오토마타"와 계량 수학의 영향을 데카르트 자신이 방법서설(철학적 정당화)과 좌표평면(방법론적 정당화)을 통해 "기계적 결정론"의 세계관으로 명시화한 공로를 생각하면, 필자의 강조점은 매우 타당하다.

또 필자는 실증 과학과 정보 이론/기술의 발전 궤적에서 인간의 정신과 신체의 물리적 연속성이 부각되며 이것이 "생물-인간의 불연속성", "기계-생물의 불연속성"을 해체하는 과정을 그린다. 즉 실증적인 연구가 데카르트의 기계론을 완성하는 동시에 데카르트의 인본주의를 해체했다는 것이다.[2]


이상의 논지는 기초적인(fundamental, not basic) 수준에서 잘 정리된 관점이지만, 정작 내게 깊은 인상을 준 관점은 따로 있는데, 이는 필자가 이 담론("포스트휴머니즘")을 대하는 태도였다.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은 사실 헤겔 철학, 현상학/해석학, 탈구조주의 혹은 후기구조주의 등 전통 철학 담론에서 등장한 인간중심주의적 사변 철학으로부터의 탈피 경향을 지목할 때 이미 시작되었다.*

지만 정보 이론의 전 분야적 팽창과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적 진보와 더불어 이 담론에 적시성과 시급성을 가미했다. 즉 이 담론은 사변적인 성격과 현실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 이 과정에서 다윈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지만, 사변 철학에서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이 등장한 방식과 별도의 함의를 갖기에 여기서는 누락한다. 필자(이상욱)는 다윈주의와 정신분석학이 실증주의 과학관과 결합하는 방식을 설득력 있게 개괄한다.[3]


필자의 태도에서 인상적이었다는 대목은 필자가 사변적인 해결에 앞서 현실적인 담론을 진행시키면, 이를 통해 사변적인 담론 역시 진척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견해다. 필자는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인공지능의 도덕적 행위 가능성에 관하여")에 데이비드 차머스의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의 구분을 채택한다.[1]


즉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지 못한다면, 근본적인 철학적 견해 차이 때문에 당장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고 시급하지도 않은 층위("어려운 문제")와 현실적으로 타협점/합의점을 도출해낼 수 있으며 그렇게 할 시급한 이유가 있는 층위("쉬운 문제")로 문제를 나누어 보자는 견해다.

필자의 견해는 차머스의 구분을 도입하는 데서 더 나아가, 쉬운 문제의 해결이 더 긴 시계열 속에서 어려운 문제의 해결의 "어려움"을 완화해주는 가능성을 긍정하는 데 이른다.* 이러한 방식은 사변적 논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실용적 현실적 논의에 리소스를 효과적으로 할당하게 해주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 필자는 이러한 사례로, '법인' 개념의 탄생 및 변천 과정과 여성 기본권의 확산 과정에 주목한다. 필자에 따르면 '법인' 개념은 생물학적 인간이 아닌 경우를 철학적 법적 층위에서 도덕적 권리/의무의 주체로 설정한 사례인데, 최초에 이 개념은 중세 수도원의 소유권/상속권 정립을 위해 탄생한 뒤 무역 및 자본주의 발달에 따라 사업의 영역으로 외연 및 내포의 확장을 겪으며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참정권과 기본권의 경우도 근대말~현대에 와서 사회적인 동인에 따라 논쟁에 부쳐진 뒤 보편적인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1] 필자의 논지는 인공지능의 도덕적 행위 가능성 역시 법적 경제적 윤리적 층위에서 현실적인 필요에 부응하는 타협점이 도출된 이후 사변적인 인식의 변화가 뒤따를 수 있으며, 이러한 순서로 논의를 진행해야 할 실용적 현실적 필요를 강조하는 것이리라.


연속성과 불연속성, 구축과 탈구축, 위대한 반복


사실 인간에 대한 특정한 보편적 인식이 정립된 경우는 역사적으로 "없다". 서양 사상사에서 인간 개념은 중세~근대의 서구 지성사에 한정될 경우에만 보편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역시 보편적 인간관은 아닌 것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의 외연과 내포는 늘 체계적/비체계적 차이에 취약하며, 지극히 국소적인 상식이었다. 또한 그 국소적 상식조차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문화 변동을 겪어왔다.


신학적인 유비 사례를 떠올려 본다.

출신이 출신이라고, 나는 과학 담론과 기술 담론을 생각할 때도 종교적 신학적 유비를 떠올리게 된다.


모세는 주변 문화권과 차별성을 두는 의미로 신-인간-동물의 구분을 극단화한 사례로, 인간 위에도 인간 아래에도 인간이 없다는 급진적인 전회를 이룩했다.

예수와 바울의 경우, 유대인들이 중앙집권화와 주변 강대국과의 대전략 차원에서 발전시킨 유대인-이방인 구분을 다시 해체했는데, 아마 제2성전 열심당원들의 과격한 투쟁이 헬라/로마 제국에게 군사적 정치적으로 패배했다는 경험적인 진단과 유대인만의 국소적 인간관은 결국 로마 제국 속하에서 지속 불가능하다는 선견지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 기계-생물-인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역시 비슷한 변혁을 거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시급한 현실적 문제 앞에서 수구적인 태도와 사변적인 태도는 지속 가능한 논의를 생산하는 데 도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용감한 타협과 점진적인 인식 개선이 사변적인 난제들의 해소/해결 가능성을 높인다.


는커녕


착잡한 점이 있다면, "인간" 이전에 "정상인", "한국인" 등 정체성 담론조차도 숙의 주제가 되기는커녕, 알고리듬으로 구조화된 메아리방 속에서 자기 소외적으로 소모되기만 한다는 점이다.

아마 당분간 "숙의"는 이루어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먹물쟁이"나 "정치병 환자" 취급 당하기 싫다면 이런 얘기는, 혼자 청취하고 좋아요나 누를 만한 얘기거리이지 누군가와 공유할 만한 얘기거리는 못 된다고 생각한다.


전문가, 정치인, 기업가, 인플루언서 등이 떠들어 대는 담론들과 산업 및 법적 수정을 통한 문화적 파고만이 대중, 아니, 핵개인들의 의견을 앞질러 가며 고고하게 무언가를 결정할 뿐이다.*

* 일론 머스크같은 인사는 이제 위키피디아의 대항마, "그로키피디아"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숙의적 비판 대신 효과적 비난이 즐비한 게시글/댓글 공론장에 뛰어는 것을 결정력 있는 대안처럼 느끼지는 않는다.


자본 집약적 기술 바벨탑이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공사의 구분과 언어적 소통 가능성은 파편화된다.


물론 이해관계가 일치하거나 취미/취향이 비슷할수록 이 기술은 의사소통의 효율성을 키우기는 할 것이다.


parmakon.


정보 기술은 바벨탑인 동시에 방언의 불이다.


쓰바 대체 인간이 뭘까.

공부는 어따 써먹으라고 있는 활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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