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전문성 담론

학교 vs. 기업 vs. 가계/개인

by 임지성의 생각



전문 인재 풀에 대한 회의론


10년 전, 5~6년 전에도 종종 언급되던 복수전공/자율전공 졸업을 정책적으로 장려하는 시도가, 구인난/구직난과 더불어 AI에 대한 불확실성 증대와 함께 다시 부상하려는 조짐이 보인다. 1차적으로는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정당한 대응으로 읽히기도 한다.


음... 하지만 이것이 어떠한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인지, 조금 더 넓은 시각에서 고민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최근 미국에서는 일부 빅테크를 중심으로 대학교육 보다, PSAT 등 기본 소양의 수준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인재들을 기업에서 직접 키워보겠다는 시도를 추세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대학교육이 직업 현장에서 요구하는 전문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고질적인 교육 담론과 연결되어 있어, 한국 상황과도 비교할 만한 안건이다.

* 팔란티어의 사례: https://youtu.be/9Il7AIzFLyg?si=PVcWPQiQOltniY8-


즉, 대학 교육이 시장과 현장에서 필요한 수준의 전문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제도적 실패, 이에 대한 한국의 일부 대응과 미국 빅테크의 대응이다. 한국의 일부 대학은 제도적인 여유 공간을 확보해 개인과 학교에게 학위 리스크를 분산하도록 한 것이고, 빅테크는 대학 교육의 무용론을 기정 사실화하며 자사에서 직접 잠재력 있는 인재들에게 훈련 기회를 부여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애당초, "기초과학 -> 공학연구 -> 시장/기업에서의 가치 창출"이라는 선형적 알고리듬[버니바 부시형 어셈블리 라인 R&D 모형] 자체가 각 분야의 고유한 가치/목표를 희석하는 잘못 설계된 기획일지도 모른다. 학문은 학문 나름의 가치를, 기술은 기술 나름의 가치를, 시장/기업은 그 나름의 가치를 갖는 것 아닐까? 우리는 근대 이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적 사회의 논리를 시장 환원주의라는 오도된 프레임만으로 잘못 평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 2030의 긱-경제화가 고도화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인재풀을 둘러싼 대학교 vs. 기업 기싸움이 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그리고 기업도, 학교도, 개인도 모두 간절하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현상이 상이한 방식의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경력 있는 새삥(?)"을 요구하는 한국 기업들과 "키워서 쓰겠다"는 미국 기업들, 장기적 생존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 청년들의 이유 있는 보류, 졸업자들이 살아 남아야 자신들 역시 살아남을 수 있는 대학교. 시대는 모두에게 치열한 몸부림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야, 고도의 자본 집약적 혁신으로 시장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어, 잠재력이 충분한 인재들을 얼마든지 수급할 수 있, 이들에 대한 훈련 비용 역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이러한 신입들에게 이러한 전문성 훈련의 기회를 보장해 줄만큼 충분히 여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리스크 분산에 해당하는 일부 대학교들의 결단은 전문성이라는 항목과는 반비례적 함수라고 할 수 있다.

* 팔란티어의 사례와 유사한 채용 방식이 일부 국내 대기업에서도 실험되고 있다는 최근 소식: https://www.erou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2289


한편 미국 일부 빅테크 기업들이 밀고자 하는 추세에는 또 다른 이유도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본래라면 첨단 기업들의 분야는 기초학문에 대한 소양과 공학적 전문성을 고도로 요구해야 하며, 훈련 비용 역시 비례하는 정도로 커야 한다. 하지만 추론 자체를 자동화하는 방식의 작금의 혁신 기술들은 잘 설계된 전문성에 관하여 디플레이션 유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


예컨대, 최근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케임브리지의 학생들에게 강연하며, "AI가 잘 표준화된 업무를 모두 대체한다고 했을 때, 인간에게 남겨질 가치는 잘 정의되지 못한 업무를 관리하는 것 뿐이다.(When AI takes over all standardized work, the only value humans have left is to handle the poorly defined work.)"라고 했던 발언의 취지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코딩으로 시작한 빅테크가 코딩 인력의 대량 수급에 목숨을 걸지 않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 https://medium.com/activated-thinker/nvidias-ceo-just-dropped-a-hard-truth-smart-is-about-to-become-worthless-8de2bc5fe363


전문성이 현장 상황에서 통하는 유연한 실무 감각을 방해하는 딜레마와 자동화 기술의 진화로 인한 직업 탈숙련화 현상이 공명하면, 이러한 미국 빅테크식 대응의 타당성이 증가할 수 있다. 한편 이는 일부 한국 대학들의 '전공 유연화 기조(리스크 분산)'에도 어느 정도 타당성을 제공할 수도 있다. 둘 이상의 전문 분야를 왕복하는 일은, (성공적으로 작동할 경우) 개인에게 단순히 전문성의 다양화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복잡하고 시급한 상황에서 발휘해야 할 유연하고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 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 계보에서 "프로네시스(φρονησις)"라고 부르는 '실천지 혹은 상황지'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도식을 현대적인 지식 언어로 번역해 보자면, ① 전문적인 지식을 키우는 '에피스테메(επιστημη)'의 훈련, 개별적인 생산성을 훈련하는 '테크네(τεχνη)', ③ 특정 전문 분야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적 구조('아르케; αρχη)'를 반성하는 메타 이론적 지혜인 '소피아(σοφια)', ④ 서로 다른 의견(독사; δοχα) 차이 사이에서 '원리와 원리(아르케 vs. 아르케)'와 '속견과 속견(독사 vs. 독사)'을 조율적으로 반성하고 실천하게 하는 '프로네시스'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모로 보아도 현대적인 직업환경에서 요구하는 역량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도의 지혜라고 생각했던 '소피아'와 '프로네시스'의 수준에 가깝다.*

*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로네시스"를 고도의 습성화/숙련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성향적인 지식(헥시스; εξις)"으로서 강조한다.


대학교가 단일 전공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일견 융합 역량에 가까운 이 '실천지'에 한 발 더 가까워지는 일이기는 하다. 만약 대학교의 이러한 결단이, 이러한 고도의 숙의 결과라면 이는 응원하는 취지로 지켜볼 만한 일일 것이다.


단, 그 숙의가 '전문성 약화'라는 또 다른 함정에 대한 고려를 포함했을 경우에 말이다.


만약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였다면, 고도의 전문성(소피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실천지(프로네시스)를 갖추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 같다. 모든 전문성이 학교에서 확보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전문성이라는 것은 학교 대신 기업에서 훈련한다고 하여 단기간 안에 갖추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이론적 체계와 현장 판단(분야적 지식+유연한 판단력)를 모두 요구하는 현대 첨단 분야의 확산 맥락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비용 부담의 문제


그래서 이 모든 것은 다시 훈련 비용의 부담을 개인, 학교, 기업이 어떻게 나누어 부담할지에 대한 논의로 수렴된다. 미국의 팔란티어와 더불어, 기사에서 언급한 국내 대기업 및 중견 기업들의 경우, 이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를 내비친 것이지만, 여력이 없는 기업들에게 이는 선택지조차 되기 어렵다. (이것이 구인난/구직난을 고용시장에 접속한 기업들이나 청년 계층의 성실성 사이에서 이분법적으로 전가하면 안 되는 이유이다. "쉬었음 청년" 현상을 보며, "너희가 경력직만 뽑는다며."라거나, "요즘 것들은 지들 좋은 것만 하려고 해."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매우 쉽고 순박한 인식이며, 진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한편 대학교의 리스크 분산 역시 생존전략인 동시에 '시장에 대한 반응'이라는 차원에서, 일부 이해 가능한 선택이기는 하다. 대학교의 입장에서 보면, "너희(시장)가 원하는 그 틀에 박히지 않은 인재 우리가 한번 도전해볼게."라는 제스쳐이니 말이다. 하지만 함정도 고려해야 한다. 소피아도, 프로네시스도, '비체계적 역량'은 아니다. 오히려 특정 전문 원리가 통하지 않는 체계적 임계 현상에 대한 '초고숙련 역량'이다.


쉽게 생각해 보자. 체계 자체를 메타적 구조에서 반성하거나, 다체계 환경에 체계를 노출하고 이해관계를 정렬/조율하는 역량이 속성으로 체득할 수 있는 역량이겠는가? 즉, 대학교의 단일 전공 포기가 전문 지식을 실천 지식과 반비례한 항목으로 만들 경우(학생들의 정체성을 '죽도 밥도 안 되게' 만들 경우), 혁신 기술이 요구하는 탈숙련화 속에 은닉한 '초고숙련화'의 함정에는 눈을 감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기술혁신의 디플레이션 유인과 선진국형 학업 인플레이션이 얽혀 만든 현 상황에서, 개인들의 사회화 비용을 근시안적으로 취급하는 태도의 귀결은 결과적으로 사회적 비용 자체를 더 키우는 비효율이다. 기술혁신 자체도 이미 어중간한 전문성은 퇴출하는 대신, 오히려 더 아카데믹한 수준의 전문성과 치명적 딜레마에 관한 역량을 동시에 요구하는, 양방향의 용 확대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


근시안적인 대책이나 '비용 전가'의 방식은 이 비용을 증폭시킬 뿐만 아니라, 최악의 방식으로 그것을 개인과 가계가 떠맡게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이미 학업 인플레이션의 추세에 대응하는 데 지속적으로 실패했다. 이미 너무 오랜 기간 우리나라는 사회화 비용을 경쟁적인 전가를 통해 개인들에게 떠안겨 왔고, 이제서야 그러한 병목 현상이 가시화되기 시작했을 뿐이다. 구인난/구직난, 출산율 감소, 고령화를 별개의 현상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역시 여기에 있다. 과거 세대가 치른 비용을 현재 세대의 것과 비교하는 일 역시 진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세대는 나름의 비용을 떠안고 있으며, 각 세대의 문제는 서로 공약 불가능할 만큼 다른 함수로 되어있다.


이 비좁은 땅덩이에서,대하는 사회화 비용을 "경쟁"의 문제로만 여기고, 그것이 마치 당연한 자연의 원리인 것처럼 인식하는 집단적 몰지각.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교리가 "죄수의 딜레마"처럼, 비용 확대 유인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장기간의 숙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고도의 지혜, 이를 숙련하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비용. 이를 기업, 학교, 개인이 서로에게 떠미는 것이 과연 최선의 방식이 맞을까? 이를 사회적인 공동 비용으로 인식하지 않는 해결책은 누구의 입에서 나오더라도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팔란티어, 삼성, SK하이닉스의 해결책은 그 나름 고무적인 측면이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도 아니고, 오로지 감당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기업들만이 실천할 수 있는 해결책이다.


아비투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헥시스"는, 중세 철학을 통해 "아비투스(habitus)"로 번역되어 서양 철학의 세계에 전승되었다. (내가 이 전통에 대해 무지하지 않은 이유는, 단지 내가 중세 신학, 개신교 스콜라주의, 철학적 해석학 등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아비투스"란, '문화로서의 "자본"'으로 읽히는, '대물림 된 부'로서의 '생활 양식'일 따름이다. 그러나 문화자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그리고 이 복잡한 현대 환경이 요구하는, 고도의 '진짜 아비투스'와는 무관한 개념이다.


우리가 이 확대된 사회화 비용을 더 큰 사회적 비용으로 증폭시키는 동안, 후속 세대가 "진짜 아비투스"에 접속할 기회는 개인의 문제로 환원될 것이다. 그리고 이 "진짜 아비투스"마저 결국에는 "대물림 되는 자본"으로 전락할 것이다.


대한민국,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계속 이렇게 서로 탓하고 책임 전가만 할 텐가.


"진짜 아비투스(헥시스/프로네시스)"는,

공존 가능한 공간에서 피어나서 다시 그곳에 새 씨앗과 열매를 내어 지속 가능하게 하는 실천적 지혜의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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