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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07. 2024

1.3 - 꿈과 현실의 ‘나’

‘나’ 없음의 아이러니



‘나’ 없음 아이러니를 고찰함에 있어 사회 구조적 문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가정과 학교에서 ‘꿈’이라는 목표와 이념을 제시하더라도, 학업과 취업의 구조는 여전히 치열한 경쟁이다. 게다가 사교육 시장의 규모는 계속해서 군비 경쟁처럼 팽창하고 있다. 진학도 결국 취업의 연장선이다. ‘초ㆍ중ㆍ고’의 12년 레이스를 버텨왔 건만, 대입시험 역시 체크 포인트에 불과했다. 어느 시점에라도 안주하는 순간 사회적 좌표는 고정된다.


요즘 이슈가 되는 ‘쉬었음 청년’*들도 지금 잠깐의 쉼표가 불리한 선택이라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오히려 취직 이후에, 그들 기다리고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기에 멈춰 서게 된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출발선과 새로운 종착지점이다. 끝없는 뜀박질 때문에 잠시 질식하며 경련하고 있을 뿐, 사실 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연애나 결혼 같은 다음 단계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의ㆍ식ㆍ주’ 같은 기본적인 문제부터가 막막한 청년도 많다. 어릴 적부터 응원받았던 ‘꿈’ 따위는 거의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적당 나’를 상대해주사람은 없기에 마라톤도 끝나지 않는다. 결국 이 트랙 위에 ‘나’를 위한 경주는 없다.

* “쉬었음 청년이란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취업자나 실업자가 아닌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된 청년 중에서 지난주 활동상태에 대한 질문에 ‘그냥 쉬었음’이라고 응답한 청년을 의미한다.”. "다양한 유형의 ‘쉬었음’ 청년 위한 맞춤형 지원 강화." (20240905). KDI 경제정보센터, 경제정책해설. 202401 수정.



사진: Unsplash의 Harry Quan



현실이 숨 막힐지라도 성인이 된 MZ세대 삼촌들은 조카들에게 ‘꿈’을 꾸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도 내 조카에게 꿈 응원을 해주고 싶다. 하지만 이미 조카들도 똑같은 레이스 위에 발 딛고 서 있다는 사실이 또다시 숨이 막혀 온다. 일찌감치 사회에 뛰어든 96년생 삼촌 또한 여전히 무지개를 좇아 뛰어다니고 있다. 이 나이쯤 되면 ‘꿈’ 따위는 도중에 버려지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꿈’ 있다는 사람들의 ‘꿈’도 순전히 ‘내 꿈’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지금’을 장식하기 위한 ‘배경 장치로서의 꿈’ 같은 경우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그 꼬락서니가 ‘꿈’ 좇는 중요한 과정으로 비추어지도록 지어낸 올려친 꿈 말이다.


‘포장지’라는 의도된 역할 때문에 결국 이런 ‘꿈’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 현시점의 초라한 나를 상쇄하기 위해서라도, ‘상향평준화된 이미지’* 속에서 꿈 후보를 골라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수치로써 계량되는 똑같은 꿈을 모두가 함께 꾸는 기현상이 연출된다. 어디에 있는 몇 평짜리 자가와 고액의 연봉, 다들 가는 신혼여행지, 얼마짜리 결혼식 비용 등. 언젠가부터 실존을 위한 기획 투사가 획일적인 메타를 따르는 통계학이 되어있다. 물론 현실적인 가치관을 무턱대고 속물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MZ들의 ‘나 자체’가 위기에 빠진 상황 속에서, ‘되고 싶은 나’도, ‘지금의 나’도, 자기 이해를 돕지 못하는 현상은 분명 큰 문제다.

* 정지우 작가의 에세이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에서 나름 중심적인 역할로 등장하는 개념.


꿈속에도 현실 속에도 ‘나’ 없는 이런 상태는 확실히 경제적 문제의 영향이 큰 것 같다. 그래서 나 같은 애매한 MZ삼촌도 느지막이 재테크를 시작한다. 사실 재테크는 이제 선택사항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노화로 인한 신체적 한계는 반드시 찾아온다. 반면 평균적인 수명은 비정상적으로 과장된 탓에, 노년에도 똑같은 문제들이 끈질기게 발목 잡을 것이다. 결혼과 출산-육아를 선택하는 개인들이 계속 줄어드는 추세를 고려하면, 앞으로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됐을 때쯤에는, 오롯이 혼자서 온갖 걱정들을 떠안아야 한다. (내가 직접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내 아이가 나를 부양해 주는 미래 역시 기대하기 힘든 현실이다.) 일련의 상황을 생각했을 때, 천진난만한 ‘YOLO’식 라이프스타일*에도, ‘돈키호테’식 드림스타일*에도 지속가능성은 없다.

* You Only Live Once. “한 번뿐인 삶,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 소설 <돈키호테>의 주인공을 닮는 삶. 현실을 신경 쓰지 않고 무모하게 꿈과 이상만을 좇아 사는 삶.


한편 우리 MZ세대는 딱히 노년을 위해서가 아닌, ‘유보된 꿈’을 위해서라도 소득을 투자한다. 주식이 되었든, 채권이 되었든, 부동산이 되었든 이 모든 코 묻은 돈 들이 ‘무지개’를 손에 쥔 미래를 조금이라도 앞당겨 올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과연 그 무지개는 ‘나의 무지개’인가? 과거 속에도 현재 속에도 없지만, 미래 속에서 만큼은 실체화될 수 있는 나의 존재란 어떤 것인가? 충분히 ‘익절’하고 나왔을 때 갑자기 ‘나 다운 삶’을 드디어 시작하게 되는 것일까? 교복 입던 시절의 나도 분명 지금처럼 신기루를 좇아 경주마처럼 살고 있었다. 지금은 단지 교복보다 조금 더 멋있는 정장으로 옷 갈아입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현시대를 풍미하는 ‘나’ 없음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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