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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07. 2024

1.2 - ‘나’의 없음

‘나’ 없음의 아이러니



커다란 아이러니는, 이런 ‘나’의 시대 속에서도 개인들의 서사는 매우 혼탁하다는 것이다. 이미 사춘기를 지나 성년에 접어든 지 수년, 많게는 십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나’를 잘 모른다. 모공까지 포착하는 4K의 시대이건만, 개인들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화소는 여전히 열화 된 채 그대로 남아있다. ‘이십춘기’ 또는 ‘오춘기’라고 부르는 ‘정체성 위기’ 현상이 바로 이런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다.


무엇이 이토록 우리의 존재감을 이렇게 혼탁하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지만, 단일하고 주요한 원흉을 지목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어쩌면 정보화 시대의 정보과잉 때문에 습관화된 ‘결정장애’가 원인일 수도 있다.  나에 대한 앎과 ‘결정’ 또는 ‘선택’이라는 행동의 관계는 긴밀하기 때문이다. 숏폼 콘텐츠의 발전 때문에 도파민에 절임 된 우리의 뇌 상태가 원인일 수도 있다. 차분하고 진지한 숙고에는 집중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완전히 적응 돼 버린 ‘숏폼 밀착형 쉬는 시간’은 분명 이런 진지한 고뇌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습관이다. 여러 지식인들이 종종 지적하는 것처럼, 이 모든 연쇄적인 흐름 때문에 글이나 대화 속에서 적합한 맥락을 파악하게 해 준다는 MZ세대의 ‘문해력 약화 한몫 기여했을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모든 외부 요인들이 각자 한몫씩 거들어 왔겠지만, 정작 더 중요한 원인은 결국 이 변화의 흐름 위에서 반성 없이 떠내려온 우리들의 삶의 태도였을 수도 있다.


SNS 플랫폼의 주된 콘텐츠가 ‘자기표현’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현상을 개선하는 데 딱히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런 이십춘기 정체성 위기를 다루는 콘텐츠들은 SNS를 ‘원흉’으로 지목하거나 적어도 악기능, 악영향, 방해요소로 언급하는 경우가 더 많다. SNS가 정체성 형성 과정에 큰 도움이 못 되는 이유는 사용자들의 플랫폼에 대한 인식 자체가 점차 변해온 탓이 크다. ‘도파민 중독’을 부추기는 숏폼 콘텐츠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고서라도 말이다. 원래 SNS는 그 이름처럼 사회적 상호작용의 보조수단에 불과했다(사회관계망서비스). 하지만 점차 초연결성을 특징으로 하는 또 다른 경쟁 시장’이 되더니, 이제는 아예 새로운 사회’ 자체가 되어 버렸다.

원제 : 눈물의 셀카. 싸이월드 시절 사랑방 감성의 사례.


SNS는 요즘 사람들에게 단지 조금 발전된 ‘싸이월드’처럼 사적인 온라인 공간이 아니다. 물론 싸이월드도 순전히 사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랑방처럼 손님들이 놀러 오는 장소였지, 눈치 보며 행동해야 하는 사교계 무도회장 같은 곳은 분명 아니었다. 반면 최신 SNS 플랫폼 사용자들은 그 안에서 눈치를 배워야 하고, 트렌디해야 하고,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끊임없이 재확인해야 한다. ‘나’를 표현하고 타인들과 연결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지만, 여기서 ‘나’의 표현은 나를 통해 반향 되는 타인들의 세계(대타존재의 세계, 대타세계)여야 한다.


진정한 문제는 이 ‘새로운 사회 속 나’의 모습과 ‘실제 세상 속 살아 숨 쉬는 나’의 모습이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온갖 화려함으로 떡칠된 SNS 계정을 소유하더라도, 그런 화려한 모습들은 ‘파편화된 순간’으로 박제되어 있을 뿐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의 맥락은 끊임없이 ‘나’에게 정체성을 위한 단서와 계기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SNS는 보기 좋은 순간만을 조각난 형태로 타자들의 세계 속에 전시하며 중요한 현실의 맥락으로부터 서서히 분리되어 간다. 현실 속의 내가 연속적인 일상 속에서 무언가를 견뎌내고, 공허감과 피로감에 허덕이는 동안에도 SNS 전시회는 ‘마감 없이’ 때깔 좋은 나 자신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어지는 글 : 1.3 - 꿈과 현실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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